기억의 의무
아마도 빌렘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한탄했을 수도 있겠다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저는 10월 26일에 이토를 쏘았는데 저의 처자식이 27일에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저의 처자식이 미리 도착해서 저를 만났다면 저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을 것입니다. 저는 이 하루 차이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토를 쏘아서 쓰러뜨린 후에 총알이 정확히 들어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 옆에 있는 세 명을 쏘았습니다. 세 명 모두 총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에 다들 회복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본문 중-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군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의 최초의 안중근 추모미사 강론 1993년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전보를 받고, 뮈텔은 백 년 전 에 처형당한 천주교인 황사영의 죽음을 생각했다.
안중근은 자신에게 영세를 베푼 사제를 향해서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는 황잡한 말을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서 이토를 죽였는데, 황사영은 서양 군함을 몰고 와서 국가를 징벌해달라고 북경의 주교에게 빌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양극단에서 마주 서서, 각자의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되었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 황사영에서 안중근에 이르는 백 년 동안 두 젊은이의 국가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갔다.
본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