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Salinger Year 은 지나갔지만,
저기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아시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My Salinger Year이라는 원서를 사놓고 정작 나는 Salinger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호밀밭의 파수꾼을 빌려다가 읽었다. 읽은 것 같기는 하다. 아마 20년도 더 전의 일일 것이다. 읽었으나, 주인공 이름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안 읽은 것과 같이 된 상태. 독서에도 갱신이 필요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는, 나는 어른이 되었구나를 확실히 느꼈다. 주인공 홀든은 방황하는 고등학생인데, 방황, 비행, 센 척, 허풍과 같은 헛소리에 나는 도저히 공감해 줄 수가 없었다. 책에 나오는 선생님들처럼, 홀든이 싫어하는, 딱 그 선생님들처럼 잔소리를 하고야 말 것 같았다. 홀든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 이해, 쉼터인데 나는 어느새 가르치려 들고, 확실한 마이웨이가 생겨버려 쉼터일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홀든은 계속 조그만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를 궁금해한다.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데 계속 같은 질문을 하니 이건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사실 궁금하다. 궁금하기보다는 걱정이 된다. 날이 추운데, 추운 날 얼음이 동동 떠 다니는 차가운 물에서 놀고 있는 오리 가족은 본 적이 있는데 꽁꽁 얼어버린 호수나 탄천에서는 오리들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어디로 간 걸까. 혹시 죽은 건 아닐까. 나 역시 새끼를 키우는 엄마이다 보니, 엄마 따라 동동 헤엄쳐 다니던 그 오리가족의 안부가 궁금하고 걱정되긴 하였다. 홀든이 만약에 나에게 그 질문을 했다면, 나는 최소한 그 질문은 무시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그 부분은 안심이다. 같이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홀든은 덜 외로웠을 것이다.
혹자는 오리 이야기가, 홀든 자신, 나아가 샐린저 본인을 투영한 것이라고도 한다. 학교라는 따뜻한 울타리를 벗어나 꽁꽁 언 겨울과도 같은 사회에 나가면, 나는 어찌 되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 일 것이다 하고 말이다. 그 부분에도 동의한다. 혹한이 닥친다는데 내 월동준비는 변변챦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애처로운 일인가 말이다. 성인이 되기 전의 청소년의 불안, 방황 이런 것들을 오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질문은 그냥 들어 넘길 하찮은 질문은 아니다. 나는 그 오리를 바라볼 수 있는 홀든을 마치 마트 진열대에 어린아이의 시선에 맞추어 진열된 장난감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생각했다. 어른들은 잘 쳐다보지 않는 곳, 그곳에 있는 것들을 아이들은 쳐다본다. 예쁘고, 깜찍하고, (비싸고), 사랑스러운 물건을 아이들은 쳐다보는데 어른들은 볼 일이 별로 없지 않은가. 아이들은 얕은 곳에 있는 예쁜 것들을 본다. 어른은 높은 곳에 있는 필요한 것들만 쳐다보지만. 홀든의 오리도 그 얕은 곳에 있는, 아이만이 볼 수 있는 예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엄마, 이것 좀 봐, 하고 부르는데 엄마가 그 장난감들을 사주진 않더라도 함께 보아주고, 예쁘다고 구경해 준다면 그 순간 아이는 행복할 텐데, 그것조차 외면받았다고 생각하면 꽤 미안하고 슬픈 일이다. 홀든은 센척하지만, 다 큰 척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라 (어린아이라고 한 것을 홀든이 알면 길길이 뛰겠지만) 그 오리들이 눈에 띈 것이고, 여리고 귀여운 존재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모두에게 이상한 질문만 하는 엉뚱한 녀석이라는 소리만 들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다들 멀쩡한 세상에서 나만 이상해 지는 기분을 견뎌 낼 수 있는 청소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비둘기들은 어디에서 죽을까가 너무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어릴 때도 아니고, 한 이삼 년 전이니 삼십 대 중반도 넘겼을 때이다. 동네마다 사람들 가까이에 살고 있는 비둘기들인데 한 번도 비실거리는 비둘기나 죽은 비둘기를 본 적이 없어서 생긴 의문이었다. 죽을 날을 알고 미리 산속으로 들어가는 건지, 죽어 있는 비둘기들을 누군가가 내가 보기 전에 먼저 치우는 건지, 그게 어찌나 궁금하던지. 신랑에게 물어보았을 때, 글쎄, 하며 뜨악 해 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는데 아마 홀든도 그런 기분이었겠지. 이런 게 궁금한 내가 이상한 건가? 그나마 나는 먹이고 입혀야 할 아이들이 둘이나 딸린 아줌마여서 그런 고민 따위 금방 잊어버릴 수 있었다지만, 고등학생 홀든은 달랐을 것이다. 한참 세상과 힘겨루기를 시작할 나이에 계속 그런 시선을 받는다면 말이다.
나와 홀든은 국적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그래도 나이대가 비슷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나이대마저도 벌어져버렸다. 나는 기성세대, 홀든은 자라지 않은 채 계속 십 대 말이다. 이제는 홀든을 이해하기보다는, 이 책에 열광하기보다는 홀든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은 걸 참아야 하는 나이가 되어버렸지만, 연못이 얼면 오리가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는 같이 고민해 줄 수 있는데, 그 마저도 외면받는 홀든이 딱하다. 이 역시 홀든이 알면 저 아줌마가 뭔데 나한테 딱하다 마다 막말이냐며 길길이 뛰겠지만 말이다.
My Salinger Year에 My Salinger moment,라는 표현이 나온다. 샐린저를 읽는 시기, 즉 십 대에서 이십 대를 말하고 있다. 나의 Salinger moment에 읽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시절에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 기억나는 건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그리고 박완서 선생의 글들이었는데 30대에 들어서 다시 한 번씩 읽어서 갱신을 한 상태라 기억이 나는 것이지 그때 읽은 것이 전부였다면 내용들을 다 까먹은 채로 살고 있을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독서에도 갱신이 필요함을, 그리고 성장소설은 성장기에 읽어야 더 제 맛일 것임을, 그리고 나는 비록 어른이 되었지만 홀든의 질문을 싹 다 무시하는 어른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야트막한 희망 하나를 느낀다.
책들이 참 많다. 읽어도 읽어도 새로운 이미 나온 책들도 많은데 매일 같이 신작들도 쏟아져 나오니 말이다. 읽을거리 많은 재밌는 세상에서 사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