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볼펜과의 재회
제목에 이끌려서 책을 한 권 샀는데 정말 특이한 책이 한 권 왔다. 수첩만 한 크기에 모나미 볼펜, 흔히 말하던 똥볼펜, 파란색이 같이 묶여 온 것이다. 나에게 모나미는 볼펜보다는 네임펜이 가장 익숙하다. 모나미의 네임펜이 그립감이나 필기감이 가장 좋다. 익숙해서인진 모르겠지만. 책을 사며, 아 이 똥볼펜이 모나미였지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지금은 필기구에 있어서는 “아무거나” 족이 되었다. 연필, 볼펜, 네임펜, 매직, 보드마카, 용도와 굵기만 맞으면 아무거나 상관없다. 브랜드도 필기감도 뭐 아무거나 괜찮다. 요즘 상품들의 품질이 내가 한창 필기구를 사용하던 이십여 년 전 보다 상향 평준화되어서 그런진 몰라도 정말 아무거나 괜찮아서 아무거나 쓴다.
모나미 153 연대기는 좀 특이하다. 소설이라고는 하는데 소설 같진 않고 모나미 153과 맞물리는 현대사를 좀 돌아보는 느낌인데 또 역사 리포트 같지도 않다. 술술 읽혀서 한 시간 만에 누워서 읽어버렸지만, 멍한 느낌이 다른 감상을 압도한다. 이게 뭔가.
볼펜 사용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것이 중학교 입학하면서 이다. 그전에는 연필, 샤프만 허용되었는데 중학생이 되며 노트 필기에, 책에 메모하는 용도로 볼펜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여학생들의 필통에는 온갖 색색의 볼펜과 반짝이볼펜, 형광펜 등의 다양한 필기구가 자리하였고, 필기 노트도 색색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노트와 색색으로 낙서가 예쁘게 된 노트, 색색으로 친구 간의 쪽지나 욕설이 난무하는 노트 등으로 다양해져 갔다. 나의 공책은 검정, 파랑, 빨강, 초록으로 비교적 단순했던 편이다. 일단 눈에 잘 들어오는 선명하고 진한 색을 선호하였고 다양한 색깔을 간수하지 못하였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 잘 잃어버리기 일쑤, 어쩌다가 장만하여도 친구에게 빌려주어 나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내 노트는 비교적 단순한 색깔이었다. 여학생치고는. 그 와중에도 확실히 기억나는 건, 모나미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에도 나오지만 볼펜똥 때문에 모두가 기피하는 볼펜이었다. 아무 데나 굴러다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그런 볼펜. 나 때는 일본산 하이테크라는 펜이 유행이었는데 그 펜의 필기감은 아주 좋았다. 색깔도 예뻤고 볼펜똥이라고 하는 잉크 뭉침 현상이 거의 없어서 하이테크는 볼펜계의 명품이랄까, 그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얼마 후 동아에서 하이테크의 짝퉁 파인테크가 비교적 싼 값으로 출시되어 하이테크를 대체할 수 있어졌지만, 그래도 하이테크가 더 나았다. 아마 0.4mm 인가하는 펜의 굵기 때문에 얇은 볼펜으로 작은 글씨를 선호하는 여학생들에게는 파인테크는 어딘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요즘은 이것도 저것도 다 좋아진 걸로 안다. 볼펜 굵기도 0.25부터 0.7까지 혹은 그 이상으로 다양해졌고 심지어 지워지는 볼펜이라는 것도 나와서 볼펜의 제1 속성, 지워지지 않음도 옛 말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당시, 25년 전 내가 중학생일 때, 학교 앞 문방구에는 새 필기구를 고르며 한 번씩 써보는 낙서가 가득했고, 무슨 심보인지 낙서를 해 보고는 다른 새 볼펜으로 골라서 집어가기도 하고, 가끔씩 볼펜을 슬쩍 훔쳐가는 아이들도 많아서 문방구에는 언제나 경고문이 붙어있곤 했다. 요새도 그런진 모르겠다. 학교 앞엔 보통 문방구가 없고, 문구류는 마트에서 대량 구매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게다가 종이에 필기하는 대신에 패드를 놓고 패드 위에 필기를 해서 저장해 가는 풍경도 익숙해졌다니, 필기구 자체가 언젠가는 학생들의 필수품이 아니라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감성의 상징물로 여겨질 날이 머지않은 지도.
모나미 153 연대기, 이 특이한 소설에는 흑심을 깎아 쓰던 연필과 만년필이라고 하는 철필만 사용하던 시대에 쏟아질 일 없는 잉크를 담아 가볍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혁신에 가까웠던 볼펜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모나미의 피지컬에서부터, 모나미의 다양한 쓰임, 이를테면 몽당연필을 끼워 쓰는 용도라던지, 장난감으로 갖고 놀던 이야기 등.
볼펜의 자랑스러운 제1속성은 누가 뭐래도 ‘지워지지 않음’ 즉 수정 불가능성이다. 이 속성 덕분에 볼펜은 오랜 세월 동안 연필보다 더 공적이고 객관적인 필기구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볼펜의 속성을 바꾸어 버린 인간의 편집욕, 한국 현대사의 민낯도 등장한다. 볼펜으로 써내려 간 자필의 진실을 바꾸어 버린 역사, 그것이 바로 잡히기까지 24년이 걸린 사건을 언급하며 지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잉크가 언제나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한다. 2009년에 이 책을 처음 기획하였다는 작가는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해서 이 책을 기획하였다고 한다. 사물은 결코 사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며 말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물이니 이 사물에 얽힌 면면들이 많기도 많을 터, 나는 볼펜똥 때문에 싫어했던 볼펜인데 이 볼펜을 가지고 153페이지의 작은 소설을 써낸 작가의 필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이제 필기구에 있어서는 아무거나 상관없는 아무거나 족이 되었으니 사은품으로 같이 온 모나미 파란색 볼펜을 잘 사용해 보아야겠다. 작고 간편하고 무엇보다 뚜껑을 잃어버릴 일이 없어 지금으로선 쓰기가 아주 괜찮다. 더 이상 15살 여학생이 아니니, 색색으로 예쁘게 정리할 필기노트도 없으니 볼펜똥이 조금 나온 들 아무 상관없으니, 이 볼펜을 다 닳을 때까지 써 보련다. 이 책에 따르면 모나미 153 볼펜을 다 쓰면, 볼펜의 길이가 145밀리미터에서 153밀리미터가 된다고 한다. 쓰면서 스프링이 느슨해지고 늘어나고 어쩌는 변화를 겪는 모양이다.
반갑다 모나미, 안 좋게 헤어질 뻔했는데, 다시 만나 좋은 만남과 이별을 할 기회가 생겨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