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다닐 때 임철우 작가의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읽었다. 주인공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슬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대학 새내기 시절에 임철우 작가의 봄날을 읽었다. 머리 크고 나서 5.18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충격 그 자체. 조정래 선생의 <한강>이 5.18이 시작되며 끝나게 되니, 조정래 선생님도 알려주지 않은 광주이야기를 알게 된 셈이었다. 임철우 작가는 그렇게 강렬하게 나에게 남아있다. 중고서점에서 <백년여관>을 집어 든 것도 임철우 장편소설이라는 저자 소개를 보고서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슬프고 아픈 이야기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운 소설이었다. 제주 4.3과 한국 전쟁, 보도연맹, 베트남 전쟁, 광주민주항쟁이 모두 나온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만 농축해 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농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기에 어쩌면 소설이 아니라 한 두 다리만 건너면 쉽게 만나는 실화 중에 실화일 것이다. 마치, 우리 또래를 강타한 IMF가 그렇듯이, 지금 우리 세대를 뒤흔든 코로나가 그렇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갖고 있는 이야기.
제주 4.3에 관한 소설은 몇 권 읽었다. <순이 삼춘>도 읽었고, <작별하지 않는다>도 읽었다. 5.18에 관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봄날>,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건의 개요나 원인이 말이다.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이 소설만 읽어서 그런 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내가 얼마큼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잘 이해가 안 갔던 이유는 두루뭉술한 언어로 접근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두루뭉술한 말이냐고?
전생에 왠지 독립군이었을 것 같은 선생님.
황현필 한국사라는 유튜브 채널을 즐겨 보고 있다. 황현필 선생님의 역사강의도 참 재미있는데, 가장 큰 매력이 시원시원함이다. 조선 후기 조병갑이라는 탐관오리를 조, 병(신), (육) 갑이라는 새끼라고 설명해 주셔서 1894년 고부농민봉기를 완벽히 머릿속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런 시원시원한 선생님의 언어를 빌려본다. 제주 4.3 추모공원에 가서 이승만 이 개새끼, 망월동 묘지에 가서 전두환 이 개새끼 소리가 나와야 정상이라고. 그렇게 육두문자를 빌린 설명으로, 4.3과 5.18에 다가가니 사건이 더 마음으로 다가왔다. 초토작전, 민간인 살상은 전쟁중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시킨 사람, 시킨다고 한 사람 모두 전범으로 처벌 받는다고 하였다. 이런 일들을 왜 교과서에서는 가르치지 않은건지. 일가족이 죽기도 하였고, 일가족 중에 혼자 살기도 하였다. 자식들을 다 잃기도 부지기수였고, 그중에는 갓난아기도 있었다. 소설은 그 난리통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에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른 이야기였다.
나는 살았수다. 돼지집에 숨어 있다가 살아났수다아. 살려줍서 살려줍서 울부짖는 우리 애기를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았수다. 이렇게 하여,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복수의 집안이 겪어야 했던, 모두 스물네 차례의 죽음은 마무리 되었다.
한 때 한국 소설 읽기가 너무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아픔이 너무 힘들어 그랬다. 하나같이 전쟁과, 이념과, 독재의 상처를 안고 있는데 너무 소설적인 비현실로 느껴지기도 했다. 현대사를 관통한 인물들의 상처를 과한 설정에 따른 염증으로 느낀 건 아마 좋은 세상에 태어나 자란 소녀의 철없는 감상이었지 싶다.
난 단지 사람을,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죽은 자와 아직 살아 있는 자, 그들의 이름 없는 숱한 사건들을, 사랑과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나는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작가후기 중에서.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왜곡되고 반복될 것이다. 그 무엇 보다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가 잊는다면, 잊어서 전해지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이 너무 너무 억울해서 그래서 기억해야 한다.
베트남 참전이 잘못이었다고 하면 참전 군인과 가족은 마음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 전쟁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다. 용맹하기로 명성이 높았다는 따이한 부대가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해방전선의 손실은 얼마나 컸겠는가.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기 자신을 모두 속이는 것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 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소설 속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인 문태는 전쟁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작가는 문태를 통해서 베트남 전쟁 중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게도 사과를 건넨다. 이런 소설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