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한 미스터리, 밤샘과 구내염을 일으키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거리에 공중전화가 있었고, 무려 <전화번호부>라는 엄청난 개인정보가 공중전화 부스마다 떡 하니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장난전화를 하긴 했지만, 귀여운 수준이었고 112나 119에 장난전화를 걸면 안 된다는 것 정도를 상식으로 교육받았다. 내가 고등학교 무렵 휴대전화가 학생들에게도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청소년 요금제가 출시되고 저렴한 가격이나 무료로 폰을 지원받아 요금제를 사용하였다. 전화 문자기능이 있었지만 요즘의 스마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번호를 일일이 외워서 눌러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야 했고 걸려오는 전화는 누군지도 모르고 받았다. 한참 후에 발신자 표시 서비스와 저장된 번호로 바로 문자 보내기 기능이 추가되어 그때부터 디지털 치매라는, 아무리 해도 전화번호를 못 외우는 증상이 생겨났을 것이다. 외울 필요가 없어져서. 그래도 아직 스마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화기를 바꾸면 모든 연락처를 일일이 새로 입력해야 했으니.
그러던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진화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아니 국민학생일 때 그려보던 2020년 미래세계처럼 모든 사람이 각자 전화기를 가지고 다니는 세상. 환경오염으로 물도 사 먹고, 공기도 사서 마실 거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 근사치에 다다랐다. 물은 이런저런 이유로 사 먹고 있고, 공기는 아마 안 팔아서, 돈이 없어서 못 사 마시는 것 아닐까, 깨끗한 공기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닌 게 되었으니. 그렇게 스마트폰이 일상이 되었다. 10년 넘게 같은 번호로 기종만 바꿔가며 쓰고 있으니 스마트폰은 나의 기록이고, 역사이고, 그냥 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모든 사진, 금융기록, 간단한 메모, 쇼핑, 그리고 SNS에 요즘은 브런치까지 하고 있으니 가계부이자 일기장이며 생활기록부이다.
스마트 폰을 쓰지 않던 시절엔 기록을 했다. 간단한 스케줄 정도의 기록이기도 하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토해낸 데스 노트이기도 했다. 대부분 내가 썼지만 나도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의 하얀 종이, 까만 글씨 수준의 끄적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버리기도 하고 모으기도 했다. 술 먹고, 아님 덤벙거리다 어디다 흘린 줄도 모르게 잃어버리기도 했다. 버린 것들은 한 권 중에 십 분의 일도 채우지 않은 다이어리, 아니 스케쥴러이고 모아두었던 것은 그래도 감정의 문장이 담긴 것들, 20대의 끄적임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어떤 건지 나도 기억이 이젠 안 난다. 그래도 몇 년 책장의 한쪽 구석에 비슷한 디자인의 다이어리 서너 권이 꽂혀있었다. 그것이 나의 기록의 전부였다. 무언 갈 끄적이고 곰곰이 써 내려갈 시간조차 없이 나의 20대는 바쁘고 신나고 즐거웠나 보다.
우울감에 출렁이던 시기를 보냈다. 아이를 둘 낳았고, 그것들은 나의 손길이 아니면 살 수 없었고, 나는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피로로 힘들었고, 코로나가 세상을 덮쳤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집안에 크고 작은 일들이 생기며 나의 위태롭던 감정이 둑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무렵 산후 우울증으로 아기와 함께 투신자살을 한 엄마의 이야기가 헤드라인으로 나오기도 했다. 안타까운 마음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 컸다. 죽고 싶다는 마음보다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게 우울증이라고 해서 병원을 찾았고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받아 다시 살아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몇 년간 모아두었던 일기장 몇 권을 버린 것이 생각이 났다. 나의 기록을 지우고 싶다는 마음, 내가 없어지면 누군가 열어볼 나의 날 것의 기록을 그냥 내 손으로 없애고 싶은 마음으로 정리를 했던 기억이었다. 아, 우울증이 이래서 무서운 거구나. 병원을 찾길 잘했다고 어차피 별 내용 없는 노트들이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스마트폰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서른부터는 그마저 다이어리도 사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메모를 남겼고, SNS에 올리기도 했으며 사진도 모두 파일로 대체되었다. 아이를 낳고는 스마트폰의 엄청난 용량으로도 택도 없을 만큼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댔으니 나의 휴대폰은 지금도 어느 클라우드에 자동으로 백업이 되고 있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 뿐인데> 이 책을 보니 우울감에 빠져 일기장을 버렸던 나의 모습이 너무 우습게만 느껴졌다. 아니, 별 것 없는 일기장은 누가 보는 게 싫어 내 손으로 버려 놓고, 스마트폰은 생각조차 못했네? 나 바보네?
일본 소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동명의 한국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와 상당 부분 다르다. 모티브만 같을 뿐, 우연히 실수로 떨어뜨린 스마트폰을 해킹당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사건. 소설의 사건들이 더 범위가 넓고 촘촘하게 깊게 진행되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소설을 고르겠다. 한국 영화도 요즘 한국 사회를 너무 잘 반영하고 있어 나는 충분히 수작이라 생각하지만, 완전히 공감과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조금 있어 아쉽긴 하다.
그리고 그때 남자는 깨달아 버렸다. 사람은 호의를 표한 정도로는 진지하게 상대를 돌봐 주지 않지만, 죽을 정도의 공포심을 안겨주면 24시간 내내 남자 생각만 해준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 그토록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울기도 하고, 웃어보기도 하고, 말을 잘 들어보기도 했지만, 사실 엄마가 자신을 정말로 잘 돌봐주길 원했다면 마유에게 한 것처럼 차라리 엄마에게 공포를 주는 방법이 더 빨랐을 거라고. 그렇지 않아도 마지막에 엄마는 어차피 자살해 버렸으니까,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죽여줄 걸 그랬다고.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가 살인자가 되어 벌인 일들이었다. 그것이 스마트폰이라는 나보다 더 나와 같은 존재와 결탁하여 섬뜩한 미스터리가 되었고, 이 소설과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스마트폰을 잘 간수해라가 아니고 주위를 돌아보고 소외되고 사람이 있는지 살펴볼 것, 외롭게 방치되는 아이들이 있는지 눈여겨볼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가진 모든 이들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은 사회의, 어른의 직무유기라는 범죄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