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화차>를 꺼내 읽었다. 세 번째다. 동명의 한국 영화가 개봉하기 몇 년 전에 처음 읽었다. 소설의 배경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인데, 15년 전인데 한국이랑 똑같네, 했었으니 내가 책을 처음 읽은 건 2000년대 인 것 같다. 그리고 2012년에 영화가 개봉을 한 후 뭔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읽었고 이번에 다시 읽었다. 2023년이 되었으니 1990년인 소설의 배경은 벌써 33년 전이 되었다. <으악>
내용은 가족의 빚에, 정확히는 집요한 빚쟁이들에 쫓겨 다니느라 학업에도, 첫 결혼에도 실패한 어느 여자가 자기 신분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어 살다가 두 번째 결혼을 앞두고 사라져 버렸는데, 그 여자를 찾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의 신분을 훔치는 일은 꽤나 치밀했다. 나이가 비슷한 사라져도 돌봐 줄 사람 없는 외로운 여자를 골라 서서히 정보를 모아가며 준비하다가 살해한다. 그리고 그녀로, 그 이름으로 산다. 과거를 숨긴 채로. 앙케트, 라느니 컴퓨터의 플로피 디스크라느니, 조간신문, 석간신문이라는 것만 빼면 지금 우리의 사는 모습에 비추어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소설은 돈에 대한, 신용 카드를 쓰는 마음에 대한, 개인 정보에 대한 시각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목숨 걸고 몇 벌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으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 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 하는 거예요. - <화차>
소설의 주인공이 신분을 훔치기 위해, 대상자의 디테일을 알기 위해 참고한 자료는 개인 앞으로 오는 우편물이었다. 통신판매 회사에서 빼낸 개인 정보로 밑그림을 그리고 당시엔 우편물로 모든 것을 받아보았으니 우편물을 몰래 미리 뜯어보는 것으로 채색을 한다. 우편물을 스마트폰으로 바꾸면 우리 시대에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 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몇 년 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 실제로 <화차> 같은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다. 개인정보의 도용과 악용 사건은 지금도 거의 매일 발생하고 말이다. 그놈의 스팸전화.
이 책을 다시 꺼내 본 이유는 넷플릭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를 보고 싶어서였다. 아이들의 봄방학이라 도통 시간이 나질 않아 아쉬웠는데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고 나니 <화차> 이 소설이 번개처럼 머리에 스쳐서 일단 책부터 꺼내 든 것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칼의 노래>에 이어 세 번 읽는 세 번째 소설이다. 명작은 명작이다. 스토리도 탄탄, 작가의 필력도 감탄, 다만 내가 일본 지리와 지역색, 문화를 잘 모르니 소설의 내용을 완전히 읽어내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은 있었다. 나는 사실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다 보니 일본 소설은 읽기까지가 조금 힘들다. 이름만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이 고유명사가 지명인지, 뭔지 모르겠을 때가 많고 그게 다 비슷비슷해서 매우 헷갈린다. 읽다가 족보가 꼬여버려 처음부터 다시 들추며 퍼즐을 맞추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차는 세 번을 읽을 만큼 재미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울림도 있다.
너는 왜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언제? 어떻게?
그것은 영화 <스마트 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에서도 비슷한 울림이었다. 누가 마음만 먹는 다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나를 행세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1990년 우편물과 플로피디스크를 쓰던 시대에도 가능했는데 스마트폰 하나면 지갑도, 신분증도 필요 없는 세상인 2023년이야 오죽할까.
영화는 사실 기대에는 못 미쳤다.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것은 사실이지만 인물 간의 개연성을 더 보여주었다면 이해와 공감이 더 잘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러닝타임이 짧은 (2시간) 영화에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긴 힘들었나 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되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는데 그걸 안 알려주다니.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그런 형태로밖에 해소하지 못하는 인간이 있단다. 어린 사토루에게 그렇게 말해봐야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삼 년 후에는 확실하게 가르쳐줘야 한다. 앞으로 너희가 맞닥뜨리며 살아갈 사회에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없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울분을 폭발적으로, 난폭하게 해소해서 범죄까지 저지르는 인간이 넘쳐날 거라고 - <화차>
1992년에 나온 소설의 문장이 마음을 찌른다. 소설이 그리는 미래가 지금의 우리 사회이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빚을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사서 다리가 있다는 착각으로 살며 울분을 폭발적으로, 난폭하게 해소하는 뱀들이 넘쳐난다. 애들에게 뭐라고 말 해 주어야 할까? 나는? 그냥 나로, 뱀이 다리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하는 뱀이었으면 좋겠는데.
영화 <화차>에서는 마지막에 불쌍한 여자를 끌어안은 남자가 말한다. 그냥 너로 살라고.
그냥 나로 살 수 있는 것, 무사히 나로 살아 낼 수 있는 것. 이것이면 족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의 쌩얼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을 보며 서글프고 아쉬울지언정, 그래도 그게 나임을 인정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