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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Mar 19. 2023

에버랜드 튤립축제.

저마다의 속도가, 제각각의 모습이 꽃밭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3월 하고도 중순, 지독한 추위에 세탁기가 동파되는 일을 겪었던 겨울도 늘 그랬듯 지났다. 아직은 춥지만, 추위를 유난히 타는 나는 아직도 롱패딩이 좋지만 그래도 3월이라 경량으로 갈아입었다. 봄을 느끼고자 하는 최대한의 노력이다. 3월 중순이 되면 여기저기서 튤립 축제 소식이 들린다. 튤립 축제가 3월 중순 이후로 4월까지 이어지는 줄, 2020년에 알았다. 그 해는 코로나가 터지던 해이다.



 2019년에 끊어 놓은 에버랜드 연간회원권으로 2020년 봄을 아주 알차게 보냈다. 코로나는 모든 것을 앗아간 듯했지만 나에겐 봄을 보는 눈을 주었다. 튤립 축제가 봄이라는 걸 알았던 것도 그때였다. 아이 둘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등원을 못 하고 집에 있었고, 보육은 다시 오로지 나만의 몫이 되었는데 그때 에버랜드를 제일 많이 다녔다. 3월에 보았던 튤립을 기억한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약간은 서늘한 바람을 맞아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는데 너무 예뻤다. 그 옆에 있던 튤립은 또 모양이 달랐다. 봉우리의 크기, 펴진 정도, 키, 색깔, 모든 것이 달랐다. 다른 라인에 심어진 튤립들도 모두 달랐다. 색도 달랐고, 어떤 것은 줄기, (구근이라고 부른 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만 있었고, 어떤 것은 이미 만개하였다. 다섯 살, 세 살이었던 두 아이를 데리고, 식당도 무서워서 못 가던 코로나 시국에 먹을 것을 바리바리 챙겨 무거운 가방까지 짊어진 나는 그때 튤립을 마치 처음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후로 2021년, 2022년 모두 3월이면 튤립을 보러 갔다.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보았다. 갈 때마다 모양이 다 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화한 정도가 다 달라졌는데 나는 튤립 축제가 시작되는 초반, 봉우리진 튤립이 더 많은 튤립 꽃밭이 가장 좋다. 추운 겨울을 겨우 보내고, 지겹게 입은 검은 룽패딩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만나는 형형색색의 봄, 튤립은 바로 그 봄의 상징이 되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익준이가 이런 말은 한다. 나이 드니 핸드폰에 꽃사진만 육천 장이라고. 그때가 2020년이다. 내가 튤립에 반한 해. 익준의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때의 내 핸드폰엔 애들 사진이 만 장이었지만, 꽃사진이 육천 장이라는 그 말이 머지않은 나의 미래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튤립 꽃밭을 보면 어떤 애는 줄기만 빼꼼한 구근, 어떤 애는 봉우리, 어떤 애는 꽃이다. 그렇게 큰 꽃밭이니 전문가가 관리와 조경을 맡았을 것이라 아주 과학적인 케어를 받았을 텐데 저마다 자라는 속도가 이렇게나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이 하나도 이질적이지 않고 잘 어우러져 오히려 풍성함을 더한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튤립 축제의 시즌이 봄이라는 것도 몰랐던 아가씨 시절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풍경이다. 아직 조그마한 구근 상태의 튤립이 초라하지도, 홀로 피어 있는 튤립 한 송이가 얄밉지도 않다. 그저 한 군데 잘 어우러진 꽃밭일 뿐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꽃들이 모두 섞여 있는 튤립 시즌이 바로 다소 이른 3월 중순, 튤립 축제의 시작인 것 같아서 올 해로 4년째, 튤립 축제가 시작될 무렵이면 튤립 꽃밭이 그렇게 보고 싶다. 마치 애들을 보는 것 같다. 똑같이 키워도 아롱이, 다롱이, 똑같이 가르쳐도 이 녀석, 저 녀석 배우는 속도는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마치 커다란 튤립 꽃밭에서 자라는 꽃들과 같아서 늦어도 빨라도, 서로 샘내거나, 이질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크고 작음이, 제각각의 모습이 꽃밭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아이들을 종종거리고 키우느라 지쳤을 때, 솔직히 내 아이와 남의 집 애들이 비교가 될 때, 이 꽃밭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심호흡을 내 쉬면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하는 노래의 앞 구절이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그때를 시작으로, 그러니까 2020년 코로나가 앗아간 그 봄 이후로 나는 봄 꽃을 유심히 관찰한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신기하다. 내일은 또 오늘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기에 그렇게 사진을 찍는다. 가지만 있던 나무에서 하얗고 노란 봉오리가 맺히고 점점 커지고 팝콘처럼 터지다 만개하고,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는 그 하루하루가 너무 신기하고 감동적이다. 그뿐인가, 꽃이 지면 연둣빛 새 잎이 나오는데 그 연둣빛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이 너무나 신통방통하다. 그래서 또 그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어느 하나 버릴 모습이 없다. 마치 신생아를 키우던 아기 엄마일 때에, 내 아기의 모습을 수 천장, 수 만장 남겨두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남들 보기엔 다 똑같다지만 내 눈에는 이것은 이대로 저 것은 저대로 다 다르고 다른대로 이쁘고 귀해서 어느 하나 지울 사진이 없었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봄꽃이 그러하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모습이 내 눈에 보여서, 그게 너무 신기하고 기특해서 그렇게 봄이 되면 꽃이 보고 싶은가 보다.


 곧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를 대략적으로 알려주는 기사가 나올 것이다. 하얀 벚나무 아래서 손을 잡고 거닐며 구경하는 꽃나무의 모습도 물론 아름답다. 하지만 아롱이다롱이 각자 다른 속도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초봄의 꽃밭을 보는 감동이 나에게는 더 크다. 묵묵히 저마다의 속도로 자라는 모습, 먼저 피었다고 뽐내지 않는 모습, 거기에 오늘은 쓰러진 튤립 한 구근을 손으로 일으켜 세워주던 어느 집 딸내미의 예쁜 손까지 보았으니 2023년의 튤립 꽃밭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저마다의 속도가, 제각각의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다운 꽃밭.

 늦가을 한 그루의 나무 안에 초록색, 연두색, 노란색 잎이 모두 들어있는 은행나무를 보며, 햇볕과 비와 바람은 공평했을 텐데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나뭇잎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햇볕, 비, 바람이었을까를 생각했다. 공평했을까, 비추는 곳만 비춰주진 않았을까, 어디엔가 가리어져 충분히 받지 못하는 잎들까지 생각하는 햇볕, 비, 바람이었을까 하고 말이다. 오늘은 꽃을 보며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금은 저마다의 모습이지만 조만간 모두가 비슷하게 절정을 맞이할 꽃들을 응원한다. 이 봄에, 새 봄에 꽃들은 그렇게 자라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아름다움과 기쁨을 선물할 것이다. 마치 우리 아이들처럼.  


내돈내산 에버랜드 방문기 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91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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