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과 과민 사이.
새벽 다섯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눈이 떠진다. 요 며칠 계속 그런다.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어 서너시간은 푹 잘 수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한동안 수면제의 도움을 받으면 숙면이 가능 했었는데 요즘 모종의 스트레스가 또 나를 누르나보다. 신경정신과 선생님은 예민하다는 표현 대신 과민하다는 표현을 쓰신다. 집에 돌아와 선생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사전을 찾아보니 예민하다는 우리가 아는 그 예민이 맞고, 과민하다는 지나치게 예민한 걸 과민이라 한다고 한다. 나는 위장 문제도 가지고 있고, 수면 문제도 있으며 둘 다 약도 잘 듣지 않을 때가 많으니 예민을 넘어서는 과민이 맞나 보다. 요즘은 예민함에 대한 책도 많이 나오는 걸로 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만 봐서는 내려놓기, 인정하기, 혹은 예민함이 가져다주는 장점에 더 집중하기 가 주된 내용이지 싶다. 굳이 내 생활에 예민이란 말을 더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상황을 아, 내가 예민하다 예민하다 해도 아직 살만한가보다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오늘도 다섯시에 거실로 나왔다. 일단 커피를 한 잔 몸에 넣고, 뭘 할까 하다가 작업을 했다. 베이킹 작업. 보통은 밑 준비를 마쳐 놓고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데 오늘은 재료도 뭔가 갖춰지지가 않았고 양도 어정쩡하고 애들과 부산을 떨고 싶지 않아 혼자 조용히 소시지빵을 만들고, 남은 반죽으로 피자를 만들었다. 딱히 쓸 만한 재료가 없었던 피자 위에는 코스트코에서 구매한 선드라이 토마토를 얹었다. 스파게티 소스, 피자 치즈, 옥수수 통조림만 들어간 피자 이지만 선드라이 토마토와 올리브가 올라가니 피자의 격이 달라지는 느낌이다. 소시지빵 위에는 냉동실을 뒤져서 찾아낸 명란젓에 마요네즈를 섞어 명란 마요 소스를 뿌렸다. 명란 마요 소시지빵이라고 하니 뭔가 더 근사하다. 모두가 잠든 새벽의 시간을 이렇게 보냈다. 아이들과 푸닥거리를 하며 베이킹을 하다가 실로 오랜만에 혼자 서서 오븐을 켜니 세상이 고요한 느낌이다. 설거지거리도, 쓰레기도 훨씬 적게 나온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엄마표 쿠킹클래스가 얼마나 푸닥거리였는지 새삼 느꼈다.
새벽에 시작한 베이킹은 우리 집 남자들이 다 일어나 정신을 차릴 때 즈음 마무리 되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우렁각시가 왔다 간 듯 식탁에 떡 하니 차려져 있는 피자와 소시지빵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엄마 혼자 만들기가 어딨냐고 섭섭해 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갓 구운 빵을 적당히 식었을 때에, 가장 맛있는 순간에, 공복에 먹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은 듯 했다. 오늘의 아침상은 엄마의 불면증을 갈아 넣은 것이란다, 어떠니 더 맛있니?
맛있게 구워진 빵을 보며 예민과 과민 사이를 생각해 본다. 예민은 까다롭고,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것만 주의 한다면, 뭐든 캐치가 빠르고 일의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고, 사람과도 더 섬세한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좋게 쓰면 좋은 것, 나쁘게 쓰면 나쁜 것이 예민이라고 생각한다. 과민은 예민이 지나친 것이라고 하니, 좋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예민이 지나쳐 도움이나 치료가 필요한 상태. 그것이 과민이라서 신경정신과 선생님은 예민하다 라는 말을 쓰지 않고 과민하다 라는 말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제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거지요? 하는 질문에 네, 과민하다고 볼 수 있지요. 라고 대답 해 주셨으니.
아이의 신학기이고 이런 저런 집안일들에 신경을 좀 쓰다보니 나의 예민이 잠깐 과민으로 돌아섰다고 생각한다. 과민이어도, 아직 생활에 큰 지장이 없고 무려 새벽 베이킹을 할 수 있어 식구들에게 맛있는 갓 구운 빵을 대접할 수 있었으니 좋게 생각해보려 한다. 곧 과민의 스위치가 꺼지고, 예민의 범주로 들어오면 나의 일상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더 수월하게, 예민표 풍성함을 가진 즐거운 생활로 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일요일, 아이들과 놀다 보면 만보를 걸을테고, 그리고 나서는 꿀잠을 잘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