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한국사 공부를 하며 새삼스럽게 외운 역사가 하나 있다. 고려사 원 간섭기.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에 우리 민족은 세계에 유례 없을 정도로 끈질기게 저항했고, 그 결과 간섭은 받았지만 지배는 받지 않았다. 그렇게 끈질기게 저항했기에 어느 정도 지분을 받을 수 있어 원나라의 중대사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세계에 얼마 안 되는 민족이었다. 부패한 정권과 권문세족은 고려 역사를 얼룩지게 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저항의 상징일 수 있었다. 삼별초의 항쟁으로 상징되는 끈질긴 우리 민족의 저항사, 조금 자랑스러워해도 되려나. 고려사는 조선사에 비해서 덜 익숙해서 그런지 조금 독특하고 독창적이다. 고려사는 문벌귀족, 무신정변, 원 간섭기, 권문세족, 신진사대부로 이어지고 그것의 흐름에 간단한 사료와 문화재를 해석할 줄 알면 시험 문제 풀이는 어렵지 않았다. 고려시대는 무엇보다 딸에게도 재산 상속을 해 주고 딸이라고 차별하지 않았다고, 남녀 균등상속과 남녀평등을 중요한 키워드로 외웠는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부모는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았지만 조정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했고, 여자를 공물과 함께 공녀로 바쳤다. 그래서 여자는 차별받을 수밖에 없었다. 숨어서 살아야 했고, 이른 나이에 결혼해야 했고, 사내처럼 변장해야 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들이 나온다. 아방과 똘, (제주방언), 아버지와 딸, 방식이 다를 뿐 모두 제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아버지들이다. 우리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스물대여섯쯤 되었을 때, 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나를 내려 주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 적이 있다. 어쩔 줄 몰라하며 어느 상가 간판 밑으로 들어가려는데 아빠가 우산을 들고 뛰어와 내 손에 쥐어 주고 본인은 비를 맞으며 다시 종종걸음으로 돌아가셨다. 우산 주러 뛰어 오던 아빠의 얼굴, 뒤 돌아가던 아빠의 뒷모습,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 그날의 아빠는 내가 아빠를 기억하는 여러 큰 장면들 중에 하나로 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소설 속 아버지들도 다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드라마 <더 글로리>에 나오는 전재준과 하도영까지 생각났을까. 전재준은 눈을 부라리며 이렇게 말한다. <아끼는 것 뺏겨본 적 있어요?> 그리고 하도영은 그런 전재준을 주먹으로 응징한다. 아빠와 딸은 그런 관계이다.
배경이 제주이다. 그리고 지금은 4월이고. 소설에 나오는 오름마다, 동굴마다 아픔 와 비밀이 있는데 4.3.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수백 년 후 제주의 아픔을 미리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조선시대의 제주는 왕이 제일 꼴 보기 싫은 죄인을 유배 보내는 유배지였고 죄인과 죄인의 가족들이 숨어 살았으며 농사가 힘들어 쌀이 귀하고 암행어사가 파견되기도 쉽지 않은 오지라 탐관오리의 각종 수탈과 진상에 살기가 너무 힘들지만 섬을 나가기도 힘든 곳이라고 나온다. 농사가 힘드니 여인들의 물질로 생계가 많이 이루어져서 여인들에게는 육지보다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곳이라고. 이런 제주에서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지기 위해 소녀들이 사라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알고 읽어서 그런지 소설의 배경이 제주인 것이 더 먹먹했다. 왜 이곳은 이렇게 슬픈 일이 많은 , 정다운 마을에서 이웃끼리 경계하고 의심해야 할 일이 왜 계속 일어나야 했는지 하고 말이다.
중국의 황제와 사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여자까지 바쳤던 역사, 한 가정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며 버텨온 믿고 싶지 않은 치욕의 역사이지만 우리 역사이다. 어쩌면 모를 뻔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미스터리 소설의 형식으로라도 만나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놀라운 건 이 소설의 저자가 한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라 미국에서 소설을 펴낸 한국계 외국인이라는 건데, 이 소설의 원서가 영어라니, 이 찰진 제주 사투리가 영어로 어떻게 표현되었을지, 영어로 표현된 조선의 우리 땅과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지가 너무 궁금하다. 원서를 사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낯선 단어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 꾹 참기로 한다. 천년 가까이 중국의 속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우뚝 올라섰음에 매우 자랑스럽다.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 내었을 그녀들과 그 가족들을 기억하기로 한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는 말이나 모피 같은 물품과 함께 고려 여인들을 공물로 바쳤다. 불행히도 사람을 공물로 바치는 악습은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명나라가 들어서자 조선 또한 전쟁을 막기 위해 명에 조공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조공 문화는 1435년(세종 재위시기)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본문 중, 시대배경-
매월아, 원칙이라는 게 있어. 지도는 따라가라고 존재하는 거야.
아니, 지도는 길을 잃었을 때 활용 하는 거야. 우리가 길을 잃지는 않았잖아.
나는 우리가 길을 잃었다고 확신했고 매월은 여행 중에 길을 조금 벗어나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다. -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