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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May 08. 2023

영초언니

널리널리 알려야 할 사람.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따끈한 신상으로 나왔을 때, 그러니까 첫 아이가 돌쟁이 무렵이었다. 시국은 2017년으로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5월 대선이라는 사상 초유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을 시절이었고 나의 인생으로는 업혀서만 낮잠을 두어 시간씩 주무시는 돌쟁이 첫 아이를 돌보던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사상초유 였다. 업혀서만 자는 아이 덕에 나는 하루에 두어 시간씩 책을 읽었다. 아이를 업고 집안일을 부시럭대면 아이는 깨서 울었고 그렇다고 핸드폰을 하기엔 시간이 아까웠기에, 그리고 시국이 시국인지라 대학시절 보았던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 등의 대하소설에 다시 손이 갔고, 그러다가 만난 책이 영초언니라는 소설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좁은 집을 서성이며 책을 읽었다. 대낮이었지만 낮잠 자는 아기가 있는 우리 집은 어둑했고, 고요했다. 이 책을 읽은 그날의 메모를 들춰보니 단숨에 읽고 싶었지만 아이가 있어 몇 날 며칠에 걸쳐 읽었음이 아쉬웠다고, 이 책이 나온 이유가 순전히 그 여자 최순실 때문이라는데 설마 내가 지금 그 여자 덕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이런 책은 빨리빨리 널리 널리 읽혀야 한다고 간단한 감상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2023년, 아이는 1학년이 되었고 아빠와 놀러 나간 틈에 세 시간 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아이가 없으니 정말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지나간 시간이 새삼 놀라웠다. 7년 동안 그래도 읽은 책이 있고 본 드라마가 있어서 그런지 책에 나오는 제주 사투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제주 시장의 풍경이 묘사되는 부분에서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고 소설 속에서 무사? (뭐? 왜?) 하고 제주 방언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음성 지원이 되는 듯 친숙했다.  이 책은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박정희 키드 서명숙 씨가 고려대학교 76학번으로 입학하며 한국의 독재정권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싸웠던 이야기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박정희 키드였노라 정의했다. 책에서는 제주도는 4.3의 무시무시한 트라우마 때문에 정부 여당에 대한, 박정희 지지율이 높았다고 나온다. 내가 최근에 공부한 바로는 박정희가 여순 사건 때 체포되었던 남로당 간부였기에 전라도와 제주도를 "알아줄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으로 박정희 지지율이 높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하튼, 3선 개헌에 찬성하고 71년 대선 때 박정희가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그 학생이 서울에 와서 독재정권의 민낯을 보며 느꼈을 배신과 혼란은 가이 짐작조차 어렵다. 공부 잘하는 나 하나만 바라보고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저버려야 하는 학생운동의 길이란, 그 역시 짐작조차 어렵다. 


유신시대와 군부독재 시절에 청년이었던, 그러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어른들은 그 시대, 민주 투사들에 대해 부채감을 가진다고들 말한다. 몰라서, 관심이 없어서, 혹은 사는데 바빠서 민주화 운동을 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서 쟁취해 낸 민주화에 무임승차한 기분이라 부끄럽다고도 말한다. 나는 그 시절을 살지 않아서 부채감은 가지고 있지 않고 그저 감사함을 느낄 뿐이다. 고문당하며 몸과 마음이 부서지고 가족에게 까지 씻지 못할 상처를 주며 지켜낸 민주주의로 내가 룰루랄라, 즐겁고 해맑게 대학을 다닐 수 있었음에, 4.19 등반대회에 신나게 참가하고, 5.18 문화제를 낭만으로 즐겼던 그저 나의 철없음을, 무식함을 반성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더라면, 그렇게 기절할 만큼 맞아가면서까지, 잘 못 한 것도 없이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민주화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답은 못 하겠다이다) 그리고 그분들은 뒷세대에게 민주화라는 선물을 안겨주려 투쟁하셨는데 나는 나의 뒷세대에게 무슨 선물을 안겨 주었나를 생각해 보면 부채감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민주화 시대에 공짜로 올라탔는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혹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딱히 노력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시절, 5개월 된 아기를 안고 집회 현장에 나간 적이 있다. 집회를 간 건 아니고 수유역에 결혼식에 갔다가 밤에 들린 것이다. 한겨울이었고, 아기를 꽁꽁 싸매 품에 안고는 박근혜는 물러가라고 외치다 들어왔다. 외신에서도 특필하는 평화시위였지만 솔직히 무서웠다. 나는 그만큼 쫄보이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뉴스를 생방송으로 보면서는 눈물이 났다. 이 책의 서두에는 박정희 시대에 몸 바쳐 싸운 투사들이 박근혜가 다시 대통령이 되는 장면을 보는 절망이 그대로 나온다. 박정희 시대를 완전히 갈아엎어 새로운 땅에 농사를 지었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았노라고, 그래서 그 시대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영초언니를 알려야겠다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땅을 완전히 갈아엎지 못해서 다시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다는, 그 과정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어쩌면 나는 나의 뒷세대에게,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게 새로운 물결의 선물은커녕 역사를 뒤로 돌리는 어리석은 수레바퀴만 내어 놓았다는 자괴감이 함께 들기도 하였다. 


심재철의 소개로 서울대 경제학과 1학년 생이 들어왔는데 이름이 유시민이라고 했다. 눈망울이 소처럼 커다란, 비쩍 마른 친구였다. 본문 중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유시민 작가가 카메오처럼 책에 두 장면 등장한다. 가냘프지만 강렬한 첫인상과 80년 서울의 봄 이른바 서울역 회군때에 서울대 유시민은 시위 해산을 반대했다고. 유시민 작가가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와 이 시절을 떠올리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학생운동을 안 하면 못 나 보이잖아, 너무 비참하잖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괴로웠다 고백했다. 때론 사람들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 스스로 비참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기도 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비참하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는 것 그거는 참 좋았어요.라고 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유시민 작가라는 유명한 사람이 되어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하면서도 문득 올라오는 그때의 감정에 힘겨워 보이는 순간이 보일 때, 나는 이런 세상을 선물해 준 선배들에게 감사함,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부채감을 느낀다. 


영초언니를 읽으며, 이 감상을 나누며, 많은 사람들이 영초언니를 알게 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아주 미약하게나마 이 마음을 씻을 수 있을까. 벌써 4,50년 전 몸과 영혼을 걸고 투쟁에 투쟁을 마다 않은 진정한 걸크러쉬 영초언니들 덕에 내가 이렇게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살고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라도 보답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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