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차정숙의 애청자였다. 뻔한 설정과 인물로, 바람피운 남편과 못된 시어머니를 응징하는 아줌마들을 위한 드라마라는 비판이 다소 있었던 것을 알지만, 그래도 너무 재밌게 봤다. 아줌마들을 위한 드라마라는 말에 동의한다. 이 집 부엌 밖의 세상, 나에게도 그런 세상이 있을까, 있었을까,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밥을 하고 치우고, 또 밥을 하고 치우는 나에게 부엌을 박차고 나가는 차정숙은 보기만 해도 힐링이었다. 비록 의사라는 멋지고 박진감 넘치는 직업이 아닐지라도, 내가 집 밖을 나가 오롯이 한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고작 10년도 안 된 주부인 나도 그렇게 설레었다.
드라마가 재미있으면 작가가 누군지 찾아보는 편인데, 이 작품은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입봉 작가라고 했다. 대단하다. 첫 작품에 이렇게 대박이 나다니, 어떤 분이신지 너무 궁금한데 드라마가 종영한 지금에도 작가 인터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부담일까, 혹은 차기작에 대한 부담일까, 인터뷰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드라마 애청자로서 매우 아쉽다.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특이했다. 못된 사람 투성이인데 미운 사람이 없었고, 비련의 여주인공도 불쌍하지 않았다. 나는 초반부터 멋진 서브 남주와 차정숙의 로맨스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기승전 로맨스로 귀결되기에는 드라마의 전개나 차정숙의 캐릭터가 너무 아까웠다. 드라마 속 정숙의 말처럼 로이 선생님이 정숙에게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나이도 젊고 멋진 분이니 어울리는 분을 만나 연애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지지고 볶으며 늙어가라는 말이 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또 한 번 결혼을 해서 제대로 지지고 볶고 살아본 정숙이 다시 남자를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남자에게 기대거나, 위로를 받으려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정숙은 첫 화부터 그냥 정숙으로 남을 것 같은 캐릭터였다.
분명 미워 죽겠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은 인물이 많다는 것, 그럴 때 나는 그것을 작가가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가 그렇다.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 투성이이다. 인물의 면면이 모두 아름다워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여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를 보면서까지 인물 하나하나에 모두 포커스를 맞추어 주는 연작 소설 같은 드라마를 써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디어 마이 프렌즈>와 <우리들의 블루스>가 나와서 정말로 기뻤다. 삶은 그렇게 사람마다 절절한 사연이 있고, 모두가 예쁘고 귀한 것이란 걸 노희경표 드라마를 보며 진심으로 느꼈는데, <닥터 차정숙>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는 20년간 바람피운 상간녀 최승희가 밉지은 않게, 귀여운 쓰레기, 하남자 서인호도 마냥 미워할 수는 없게, 못 된 시어머니이지만 그래도 미운 정이라도 들게, 은서와 이랑이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도 딱하기만 하게 그려 내었다. 등장인물들 모두 각자의 장을 받아 이야기를 펼쳐도 충분할 정도로. 분명 악역인데도 미워할 수 없게 그린 다는 것, 사람을 엄청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가능한 일 아닐까.
불륜을 응원하는 건 아니지만 승희가 받았을 상처와 상실감도 보듬어 주고 싶다. 제때 제대로 보듬어 주질 못해서 복수심으로 아이를 낳고 상간녀가 된 것 같아 그녀 역시 딱하다. 이쯤 되면 두 여자 인생을 망친 서인호가 상쓰레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는 하남자라는 귀여운 별명을 얻는 쾌거를 이루었다. 도대체 무슨 치명적인 매력이 있기에 바람피운 남편, 불륜남 타이틀을 가지고도 두 여자의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서인호 캐릭터의 가장 큰 매력인데 김병철 배우가 연기를 너무 찰떡같이 해 내었다. 오히려 전형적인 멋진 남자, 공유나 원빈이 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욕을 먹었을 텐데 우리 주위에 있을 법 한 친근한 캐릭터라 착한 시청자들이 차마 미워하며 내치지 못했나 보다.
차정숙 역을 엄정화가 연기해서 너무 반가웠다. 아마 엄정화 배우가 아니었다면 드라마를 안 봤을 수도 있다. 나는 어느새 드라마 주인공이 아는 배우가 아니면 잘 보게 되지 않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려서 새로운 드라마의 낯선 배우들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엄정화의 30년 넘는 연예활동을 자라면서 봐 왔다. 가요 톱 텐에 나오던 모습부터 아파서 잠깐 쉬었던 모습, 그러다 드라마에 다시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고마운데 요즘엔 댄스가수 유랑단으로 예전의 전성기를 완전히 넘어서는 활동을 보여주어 정말 좋다. 나이가 들어도 댄스가수로, 섹시 디바로, 핫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언니”의 모습을 보여주어 같은 분야에 있지 않은 나도 이렇게 힘이 난다.
닥터 차정숙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에게 속해 있지 않고, 병에 쓰러 넘어지지 않고, 애들만 바라보지 않고, 또 다른 남자를 찾지 않고 오로지 자기 혼자 만의 힘으로 행복하고 삶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힘이 나고 행복했다. 혹자는 로이가 자기 좋다는데 그 역시 얼마나 좋냐고도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 나도 만약에 이혼하면 절대 재혼할 일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숙이가 로이 품에 안겨 안정을 찾을 거라 생각이 들지 않았고, 실제로도 결말이 그렇게 되어 정말 기뻤다.
<닥터 차정숙>의 작가가 너무 궁금하다. 노희경 작가의 대사가 폐부를 찌르듯 아프다면, 이 드라마의 대사는 허를 찔리게 웃겼는데 두 작가 모두 제대로 찌른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더 궁금하다. 모두를 뿜게 만든 남편이요? 죽었어요. 하는 대사를 노희경 작가가 썼다면 뭐라고 썼을까. 아마 모두를 숙연하게 눈물짓게 하는 한 마디로 상황을 종료시켰을 것 같다. 겉으로 뿜게 만들고, 속으로 삭이게 만들고, 두 작가의 다른 점은 여기에 있겠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명대사이다. 남편이요? 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