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김밥, 월남쌈.
불을 쓸 줄 아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 체온 유지도 수월해지고, 먹는 음식에도 변화가 생겨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큰 시발점이 바로 불이 아닐까.
거의 매일 불 앞에서 무언갈 한다. 계란이라도 부치게 되는 것이다. 옛날 옛적처럼 가마솥 앞에서 장작불을 피우는 것도 아닌데, 불 쓰는 것이 그렇게 귀찮고 싫어지는 때가 있다. 바로 여름. 어른들은 진짜 속 편한 소리 한다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에어컨도 있고, 주방 가전도 다양해졌으며, 냉동식품 혹은 밀키트가 이렇게 잘 나오는데 밥 해 먹는 게 뭐가 그리 힘드냐고. 그런데 장마 아니면 폭염인 요즘, 몸이 축축 늘어지거나 열불에 타오르기 직전인 요즘엔 불 쓰는 것이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그냥 요태기처럼, 요새 조금 그러는 건지, 몸이 좀 지친 건지, 정말 날씨 때문에 그런 건지 모르겠다. 작년엔 뭐 해 먹고살았지.
이런 날은 불 하나도 안 쓰기에 도전한다. 참치캔을 따고 크래미를 하나 찢은 뒤 마요네즈를 넣고 쓱쓱 비비고, 냉장고 찬밥을 데워 초대리로 간을 한 뒤 삼각김밥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기 시작하여 집에서 해 주려고 김과 틀을 구매해 두었었다. 돌돌 마는 김밥보다 훨씬 간편하다. 마요네즈가 듬뿍 들어간 참치 마요를 밥에 가득 넣어 삼각 김밥을 싸니 내가 보기엔 아주 그럴듯하고 좋다. 아무래도 편의점 삼각김밥 보다야 집에서 만들어 준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 아이들은 편의점 삼각김밥이 더 맛있다고 한다. 아니, 이렇게 속을 듬뿍 채워줬는데도 1패를 기록하다니. 편의점 삼각김밥에는 도대체 무슨 비법재료가 있는 것일까. 여하튼, 전날 먹고 남은 채소 볶음과 과일, 삼각김밥과 스트링 치즈로 한 끼를 해결한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뒤져 채소들을 꺼내 그냥 썰었다. 잡채를 해 주려고 사 둔 파프리카를 그냥 채 썰고, 고기 구워서 쌈 싸 먹으려고 했던 깻잎도 그냥 채 썬다. 그리고 당근도 그냥 채칼로 쓱쓱 밀어 월남쌈 먹을 준비를 한다. 밖에서 사 먹으면 이 풀떼기들을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사 먹기가 아까울 때도 있는데 막상 집에서 그렇게 다양한 채소들을 가늘고 가지런히 준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밖에서 먹는 사 먹는 월남쌈보다 훨씬 간소화된 보급형 집밥 월남쌈이 준비되었다. 파인애플 대신 자두를 썰었고, 고기가 없지만 삶은 달걀과 남은 참치 마요로 단백질을 채우니 뭐 이 정도면 됐지. 덕분에 생채소를 많이 먹을 수 있고, 불 쓰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 물러 버리는 일도 없게 아주 잘 되었다.
매년 7월이면 옥수수도 한 자루 사다가 삶아서 먹고 냉동하고, 작년엔 무려 만두도 빚어 쪄먹었는데, 올해는 뭐가 이렇게 귀찮은지 모르겠다. 요리는 한 번 손을 대면 가속도 붙듯, 마치 술이 술을 먹듯, 잠이 잠을 부르듯,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것저것 장 봐 온 것을 해치우려 움직여야 하는데, 반대로 손을 놓기 시작하면 귀찮음이 마찰력이 되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 멈춤 상태가 되곤 한다. 요즘이 딱 그렇다. 계란 부치기도 귀찮아서 한 번에 왕창 삶아 냉장고에 넣어 두고 하나씩 까먹는 중이다.
아 똑똑한 두뇌를 가져 불을 쓸 줄 알게 된 호모사피엔스의 슬픈 운명이여. 여름이면 이렇게 한 번씩 불이 싫어진다. 전기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가 있어 그나마 집에서 뭘 해 먹을 수 있으니 현대 문명을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장작불과 가마솥 앞에서 밥을 했을 옛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래도 에어컨에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은 불을 써 보려 한다. 냉동 갈비탕을 끓여 내고 두부라도 부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