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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Aug 03. 2023

사십 대의 어느 하루

희망사항

날이 더워도 너무 덥다. 학원들도, 유치원도 쉬는 아이들의 온전한 여름방학 일주일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작년까진 한낮 더위만 피해서 놀이터도 가고, 에버랜드도 가고, 산책도 다녔는데 올 해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내가 먼저 호로록 녹아 없어질 것 같아서 에어컨이 있는 집, 아니면 키즈카페로 겨우겨우 하루를 보내는 판이니, 일주일이 이렇게 길었나, 아니면 한 살 더 먹었다고 이렇게 달라진 건가, 아니면 정말 작년과 다르게 올해가 더 더워진 건가.


아이들과 어린이 도서관에 잠깐 갔다가 외식을 하고, (어린이 도서관은 핑계고 외식을 하러 나갔다) 들어와서는 오랜만에 에어바운스를 꺼내어 주었다. 거실 소파를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과 수고가 들지만, 그래도 한두 시간은 키즈카페에 나에 나간 것처럼 땀을 빼며 놀 수 있어 한여름과 한겨울에 유용하게 쓰는 효자템이다.   


 박완서 님의 차분한 수필을 읽었다. 사십 대의 비 오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세 조각의 글을 엮은 수필인데 잔잔한 일상의 장면들이 글에 녹아 있어, 마치 흘러간 흑백 영화의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땀을 뺄 만큼 뺀 아들들은 욕실에 넣었다. 물비누 한 통 던져주니, 이상한 실험을 하는 아저씨들이라며 구독과 좋아요를 부탁하며 비누 물놀이에 빠져든다. 계속 책을 읽었다. 아들들이 노는 현장은 보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나중에 다 놀면 엄마를 부르라고, 부르기 전에 엄마가 화 낼 만한 것들은 좀 치우라고 당부해 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변진섭과 성시경이 함께 부른 <희망사항>을 무한 반복으로 듣고 있다. 나는 노래 한 곡에 꽂히면 며칠이고 계속 듣는데 이번에 이 노래에 꽂혀버렸다. 성시경이 말한 이 곡의 선곡 이유는 요즘 친구들이 재밌어할 것  같아서 라는데 아닌 게 아니라 옛날 사람인 내가 오랜만에 들어도 노래가 참 귀엽다. 비슷한 버전으로 홍서범의 구인광고라는 노래는 살짝 거부감이 있는데 희망사항은 그냥 예쁘고 귀엽다. 구인광고가 선을 살짝 넘었다면, 희망사항은 선 안에 있는 기분이랄까.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속으로 한 구절 한 구절 다 토를 달아본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고, 멋 내지 않아도 멋이나 고, 그냥 이쁜 여자라고 하지 왜? 얘기 재미없는데 웃어주면 진짜 재밌는 줄 알 테니, 절대 웃어주면 안 되지. 돈이 없을 때에도 맘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여자, 그저 바라만 봐도 위로가 되는 여자는 인정, 근데 김치볶음밥은  좀 직접 해 드시지?


노래를 계속 듣노라니, 희망사항의 구절구절을 아들들에게 대입하게 된다. 꾸미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고, 바라만 보아도 위로가 되며 제 밥 정도는 자기가 뚝딱 차려 먹을 줄 아는 그런 아들로 키워야지. 제발 김치볶음밥은 네 손으로 해 먹으렴.


책으로 만난 박완서 님의 사십 대는 비 오는 칙칙한 하루하루허투른것 하나 없이 차분하고, 고요하고, 담백해 보이던데 나의 사십 대는 햇빛이 쨍쨍한 날도 이렇게 우당탕탕 시트콤이다. 당분간 김치볶음밥을 먹을 때마다, 요리할 때마다, 성시경과 변진섭의 이 노래와, 박완서 님의 사십 대를 그린 이 수필 한 편과, 에너지를 뿜어내던 아들들의 작은 몸, 엉망진창이 된 욕실이 떠오를 것 같다.


이 여름, 너무 덥다. 길고. 지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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