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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Aug 11. 2023

無맛의 복숭아.

새 단장을 하다.

복숭아를 샀는데 맛이 없다. 벌써 두 번째 실패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닌 것이 비가 너무 많이 왔다. 과일에 맛이 들었을 리가 없다. 멀쩡히 살아남은 복숭아에게 고생했다고 토닥토닥해줘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맛없는 복숭아엔 정말 손이 안 간다. 복숭아가 무 맛이다. 아무 맛이 안 난다. 딱딱한 복숭아라 그런지 수분감도 적다. 이를 어쩐다. 삶아야지.


친정엄마는 과일을 종종 이렇게 삶아서 오래 보관하셨다. 주로 너무 많이 생겨 처치 곤란인 과일이거나, 그냥 먹기엔 너무 맛이 없을 때 과일을 깎아 과일이 겨우 잠길 만큼 물을 넣고 설탕을 넣어 끓여서 냉장고에 보관하면 시원하고 단 맛에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복숭아를 이렇게 하면 복숭아 통조림에 절대 뒤지지 않는 맛이 된다.  우리 엄마는 설탕만 적당히 넣으셨는데, 당뇨나 다이어트가 걱정이라면 스테비아와 같은 다른 대체제를 사용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설탕과 스테비아를 반반 섞었고, 레몬즙을 쭈욱 짜서 넣고, 소금도 한 꼬집 넣었다. 팔팔 끓이다 보면 복숭아가 말랑해지며 불을 꺼도 되겠다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그때 불에서 내려 한 김 식혀서 냉장고에 보관하면 된다.

홈메이드 복숭아 (통) 조림.


사놓고 너무 맛이 없어서 하루 이틀 상온에서 후숙을 하면 괜찮을까 싶어 며칠 놔뒀더니 날파리가 너무 꼬여서 냉장고에서 보관하던 무맛의 딱딱한 백도가 그렇게 새 단장을 하여 다시 냉장고에 입성했다. 몇 날 며칠 냉장고를 열 때마다 한숨이 나던 복숭아였는데 이젠 꺼내어 시원하고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한결 기분이 좋다. 저 채로 갈아서 먹어도 맛있다. 생으로 먹었을 땐 맛도 향도 나지 않았는데 삶아 내니 복숭아 향이 나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그 복숭아 향기는 과육 안에 꽁꽁 숨어있다가 따뜻해지며 기지개를 켜듯 밖으로 나와, 나 원래 복숭아였어요, 하고 숨바꼭질에서 이긴 듯 기고만장 향기롭다.


과일값이 너무 비싸다. 이상기후에 과일을 맛볼 수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하겠지만 제철인 초록사과도 아직 너무 비싸서 맛을 못 봤다. 비싸기만 하면 괜찮은데 맛이 없다. 내가 과일을 잘 못 골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복숭아를 두 번 내리 실패해 보니 과일 사기가 망설여진다. 한국의 올해 날씨가 너무 무지막지하게 극한이어서 아무런 불평도 할 수가 없다. 당부 간 바나나와 씨 없는 포도, 파인애플 같은 수입과일을 먹어야 하나, 그럼 우리 농민들은 어쩌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날이다.


어릴 적 친구네 집에서 얻어먹은 복숭아 생각이 난다. 친척이 과수원을 해서 그 집에서 가져온 복숭아라고 나누어 주셨는데, 복숭아에 벌레가 먹어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쪽을 잘라내고 한 입 맛보니 정말 천상의 맛으로 달고 맛있었다. 설탕물, 꿀물이 그것보다 달았을까, 벌레란 놈, 맛있는 과일인 줄 알고 먼저 먹고 있었구나 하며 온 식구가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다. 언젠가 먹었던 홍옥 사과 생각도 났다. 새콤한 사과의 맛, 나는 사과의 산미를 좋아하는데 새빨간 사과에서 나던 입에 침이 가득 고이는 사과맛을 잊을 수가 없다. 백설공주가 이래서 사과 한 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구나, 이런 안 먹을 수 없이 예쁘고 맛있는 사과에 독을 넣다니, 왕비도 참 똑똑하다 생각을 했었다. 다시 그런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을까? 여름마다 이렇게 날씨가 점점 더 무지막지하게 가혹해질텐데, 맛있고 건강한 과일마저 라떼의 일이 되는 건 아닌지 문득 걱정이 된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도 과일값이 비싼 나라라고 한다. 나는 조금 비싸도 맛있는 과일이면 기꺼이, 조금사서 맛있게 남김없이 먹는다. 내가 지불하는 과일 값이 과일 키우느라 수고한 농민들에게 돌아간다면 전혀 아깝지 않은데 농민들의 수입은 적고 그것이 유통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 지난 폭우에, 이번 태풍에 과일들은, 농민들의 마음은 괜찮을까, 애써 키운 과일들이 맥없이 떨어질 때, 그 속상한 마음은 어떨지 감히 헤아리기도 힘들다.


맛없는 복숭아를 버리지 않고 가공하여 먹는다. 조금 있으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 사과의 제철이 다가올 텐데, 사과는 제발 맛있었으면 좋겠다. 아줌마가 되어서 좋은 점 중에 한 가지는 농수산물의 제철이 언제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뭐가 언제 맛있는지, 예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엄마가 주는 걸, 집에 있는 걸 먹었을 뿐. 제 철음식을 찾아 먹다 보니 계절 가는 것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게 되고 그것들 애지중지 키우느라 애쓰셨을 마음들을 생각해 보게 되고, 날씨 따라 내가 장바구니 물가가 달라지니 여름 폭우, 봄 가뭄 이런 세상사에도 관심이 간다. 장 보고, 밥 하는 것이 울적할 땐, 이렇게 장을 보고 밥을 하며 내가 얼마나 성숙하였나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좋아진다. 어쩌면 이번 복숭아처럼 무 맛이었던 나의 세계가 이렇게 애 엄마 노릇을 하며 설탕물을 뒤집어쓰고 맛도 들고, 향기도 돌아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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