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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Aug 23. 2023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발효종 만들어 빵 굽기.

오렌지 베이커리라는 영어 원서를 소개받았다. 원서를 읽어 주는 온라인 학습지를 이용 중인데 사실 듣다가 말다가 하던 차였다. 원서의 난이도에 따라 열심히 듣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제껴버리기도 하는 영어 강사인 나, 어쩌면 어려워서 공부가 하기 싫은 아이들의 마음을 내가 제일 체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책은 베이킹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귀가 솔깃한 책이었다. 원서를 살까 하다가 한국어 책으로 샀다. 쉽게 후딱 읽고 싶어서. 뭐, 영어 독서도 좋지만 일단 책을 읽는다는 것이 좋은 거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영국 런던에 사는 한 소녀의 이야기였다.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와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된 아이, 그 아이는 베이킹을 통해 치유하고 성장하고 위로받고 위로를 준다.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울 때, 구울 빵을 생각하면 진정이 되고 빵 반죽을 만지고 빵이 부푸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아이는 자기에게 찾아온 시련을 이겨내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책이기도 하다. 아이는 베이킹을 통해 치유했지만, 그 베이킹은 가족과 온 마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빠가 가장 먼저 본인을 희생하여 아이 곁을 지켰고, 빵 구독을 해준 사람들, 필요한 물건을 교환해 준 고객들, 불편을 마다하지 않으며 곁을 내어준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는 오로지 빵 구울 생각을 하면 되었고, 필요한 전기공사라든지,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은 아빠가 어떻게든 해 주었으니 그 아빠는 아마도 불도저 같은 성격의 상사를 모시고 일을 하는 기분이었으리라.


빵 굽는 이야기를 계속 읽다 보니 나도 빵이 굽고 싶어졌다. 다른 것도 아닌 발효빵, 발효빵 중에서도 발효종을 만들어 굽는 진짜 발효빵말이다. 보통은 안전하게 이스트를 넣어서 발효시켜 굽는다. 발효종 만들기를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할 때마다 실패였다. 안 크거나, 물이 생기거나, 냄새만 나고 썩어버리거나. 이 책에서는 무려 51년 동안 살아남은 발효종 퍼거슨이 나오는데 주인공 소녀는 처음에 그 발효종을 사다가 퍼거슨이라고 이름 붙여서 계속 키우며 빵을 굽는다. 새로 키우는 발효종의 이름은 뮤리얼이다. 아이는 이렇게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생명으로 다루며 존중하고, 아낀다. 마치 꽃을 키울 때에도 이름을 붙여주고, 말을 걸어주고, 노래를 불러주면 잘 자란다고 하는 것처럼 아이의 빵은 이렇게 극진한 보살핌과 존중을 받으며 하루하루 더 맛있어진다.


나도 발효종을 만들어 보았다. 물과 밀가루를 섞어 두면 되는 일인데 정말 마법처럼 보글거리는 기포가 일며 생명이 움튼다. 마치 새싹이 돋아나듯, 여름이라 시간은 더 단축되었다. 나도 이름을 붙여줄까, 하다가 몇 번 굽고 말 것 같아서 명명은 보류했다. 잘 자라라고 물을 주고 밥 (밀가루와 물을 추가하는 것)을 주며 며칠을 키웠더니 정말 책에서 보는 것과 같은 발효종이 되었다. 옳다구나, 구워보자.


첫 빵은 처참히 실패했다. 이유를 모르겠다. 발효종은 잘 컸는데 빵 반죽이 부풀지 않았다. 부풀지 않은 빵은 구우면 떡처럼 되고 딱딱해져 먹을 수가 없다. 발효종을 이용한 빵 반죽은 발효종마다 물과 밀가루의 양이 다르기 때문에 질기를 맞추기가 힘든 것 같다. 물과 밀가루의 비율을 맞추지 못한 것으로 실패의 이유를 추측한다. 그래도 살아남은 나의 발효종으로 두 번째 빵을 구웠는데 먹음직스럽게 부풀고, 구수한 냄새와 맛을 풍기며 어느 정도 성공 했다. 완벽한 성공은 아니다. 파는 빵처럼 칼집을 내지도 못했고, 덧밀가루 뿌리는 것도 깜빡 잊어 비주얼 적으로도 실수가 있었는데 집에서 먹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정말 밀가루, 소금, 물이 만들어낸 마법 같은 일. 버터와 우유, 계란도 들어가지 않은 시골빵이다.


그냥 먹어도 담백하니 맛있는데, 아보카도나 치즈, 햄 같은 재료를 올려 샌드위치를 해서 먹으면 든든한 식사빵이 될 것 같다. 통밀로 구워서 건강에도 더 좋겠지, 두 번째에 성공하여 구워져 나온 빵을 보며 나도 미소를 지었다. 베이킹은 이 맛에 한다. 반찬 만드는 것 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기쁨이다.


남은 발효종은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다음에 빵을 만들고 싶으면 다시 꺼내서 깨우면 된다고 하니, 더위가 가기 전에 한두 번 정도 발효종을 이용한 발효빵을 만들어 먹어 볼 계획이다. 나도 그 소녀처럼 발효종에게 이름을 붙여줄까, 빵빵이라고 하면 어떨까. 빵빵이를 이용한 호떡이나 치아바타도 맛있을 것 같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요리 책 한 권을 사서 정독한 기분이다. 애들한테 잔소리할 자격이 없다. 그래도, 영어공부가 뭐 대수냐, 사람 사는 일상에 재미를 더해주면 그게 최고지! 이렇게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일이라면 영어 공부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뒤로 미뤄도 되겠다. 지식이 아니라 행복을 배울 수 있는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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