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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Aug 30. 2023

누명을 벗은 빵

이렇게 기다림과 정성이 들어간 천연 식품이라니.

갑자기 키우기 시작한 천연 발효종은 정말 잘 자랐다. 하루에도 몸집을 두 배, 세배씩 늘리며 힘을 자랑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유리병이 가득 차고도 넘치게 흘러넘쳐 나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천연 발효종을 키워보며 생각한 것은 빵은 그동안 참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았구나, 하는 것.


탄수화물 중에서도 정제탄수화물에 설탕, 버터가 과하게 들어가고 대표적인 밀가루 음식으로 건강에 안 좋다는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빵, 오늘 그 누명을 한 번 풀어드릴까.



밀가루와 물을 동량으로 넣어 실온에 두면 보글보글 하며 기포가 살아난다. 밀가루에 남아있는 효모와 물, 그리고 공기가 만나 새싹이 움트듯 발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첫날은 거의 보일 듯 말듯한 기포이지만, 하루에 한 번 물과 밀가루를 보충해 주는 소위 밥 주기를 하다 보면 둘째, 셋째 날엔 보글거리는 기포가 꽤 많이 보이고 부피도 훨씬 커지며 냄새도 새큼한 냄새가 난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밀가루에서 효모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 발효종은 스스로는 자라지만 다른 밀가루 반죽까지 발효시킬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하루 이틀 더 기다리며 밥을 주고 마침내 한 숟갈 떠서 물에 떨어뜨렸을 때 동동 뜨기 시작하면 그때는 엄청난 힘을 가진 발효종이 된다. 백밀가루보다는 통밀가루나 호밀가루가 더 잘 된다고 한다. 효소나 다른 미생물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이스트를 활용한 발효빵은 그 많은 미생물들 중에서 몸집을 키우는 발효에 특화된 놈들만 골라서 건조한 것들이니 영양가로 치자면 별로 큰 가치가 없고 그저 밀가루 반죽에 공기를 빵빵 주입시키는 역할을 잘하는 것들이란다. 모든 미생물을 활용하여 스스로 살아나고, 자라나고, 다른 반죽까지 키워내는 발효종을 이용한 발효빵이 어찌 보면 정통이라 하겠다.



이스트를 활용한 발효빵을 만들어 볼 때마다 옛날에는 이스트가 없이 어떻게 빵을 만들었을까 궁금했다. 우리나라는 빵을 먹지 않았지만 몇 백 년 전 유럽에서는 어떻게 빵을 만들어 먹었을까, 맥주나 와인을 활용하여 발효시켰을까 상상했었는데 그냥 밀가루에 물을 섞어 기다리면 발효종이 되고 그것으로 빵을 구울 수 있었다니, 통곡물을 맷돌에 갈아 물로 발효시켜 소금을 넣어 반죽하여 구운 빵은 건강식품이었을 것이다. 좋은 탄수화물과 미네랄, 단백질까지 공급하는 어쩌면 완전식품. 그 기다리고 기다려야 완성되는 슬로 푸드인 빵이 현대에 와서 백밀가루에 이스트, 각종 첨가물과 과도한 지방, 당분이 들어가며 건강을 위협하는 주범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빵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직접 만들어보니 빵은 몇 날 며칠 기다리며 발효종을 키워야 하고 반죽해 놓고 또 기다리며 부풀려야 하고 그래야 비로소 구워낼 수 있는 온갖 정성과 시간의 집합체였다.


발효종이 너무 잘 자라는 바람에 그리고 발효종을 죽이거나 재우기가 아까운 마음에 몇 날 며칠을 열심히 빵을 구워댔다. 건강한 발효종 반죽으로 설탕과 버터를 넣은 시나몬 롤을 만들기도 하고, 피자를 굽기도 하고, 물, 소금, 밀가루, 발효종만 넣은 담백한 건강빵을 구워 온갖 햄과 치즈를 올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빵을 주식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애들도 개학하고, 나도 신랑도 일을 하니 매일 삼시 세끼 식사를 집에서 하질 않아 이렇게 계속 빵을 구워대다가는 빵 소진이 어려워질 것 같아 (아직은 이웃에게 나눌 만한 솜씨는 못 된다) 발효종을 건조하기로 하였다.건조 보관한 발효종은 다음에 물에 풀어 다시 활용이 가능하다하고 냉장 보관이나 냉동보관보다는 건조하여 조각조각 나누어 실온 보관 하는 것이 가장 부피를 적게 차지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천연 발효빵에 한참 푹 빠져 지내다 보니 가뜩이나 정신없이 바쁜 일상이 더 빠르게 지나간 기분이다. 아들 둘 밥 주는 것도 모자라 발효종에도 밥을 줘야 하고, 때 되면 반죽하여 구워내야 하고, 맛있게 먹어야 하니 이런저런 것들을 더 만들어야 하고, 그런데도 발효종 키워 빵 굽기가 재미있었던 것을 보면 베이킹은 밥 차리기와는 또 다른 차원의 힐링을 주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빵 반죽을 주물럭 대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이 멍을 때릴 수도 있고 (일명 주물럭멍, 아이들이 왜 슬라임이며 흙장난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오븐에서 나온 빵을 바라보는 행복감이나, 주는 대로 잘 먹고 쑥쑥 자라는 발효종을 바라보는 엄마 마음 같은 것들이 나를 일상에서 빼내와서 다른 차원에 갖다 놓아, 잠시 일탈의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달까.


암튼 이도 저도 바쁜 일이 많아지는 9월을 맞이하며 발효종은 건조하여 잠재우기로 했다. 당분간 빵 굽는 일은 없지 싶은데 또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잘 자던 발효종을 흔들어 깨워 집안을 빵굼터로 만들며 푸닥거리를 하게 될지, 빵을 만들어보면 빵은 사 먹는 거야, 하고 두 손 두 발 다 드는 사람도 많다던데 나는 서툴고 모자란 솜씨이지만 빵 만들기가 이렇게 재밌다.


발효종, 빵빵이, 잘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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