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어두컴컴한 날, 더위가 한 김 가시고 바람이 살살 불어 쌀랑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을의 초입. 그냥 하루 늘어질 생각이었는데 우리 아파트 13층의 인테리어 공사 소리가 너무 컸다. (참고로 우리집 3층) 도무지 책에 집중이 되지 않아 핸드폰을 열어보니, 작년 이 맘 때에 하트쿠키 (엄마 손 파이)를 만들어 먹은 사진이 나온다. 맛있겠다. 집에 재료가 있나? (없을리가)
오븐 들어가기 전 오늘의 진짜 엄마 손 파이.
여름은 발효 빵의 계절, 겨울은 디저트의 계절이라고 한다. 기온이 높으니 발효가 금방 쉽게 되어 여름에 발효빵 만들기가 쉽고, 버터나 크림을 차갑게 다루어야 하는 디저트는 겨울이 제격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늦여름. 혹은 초가을.파이를 만들기에는 애매한 계절이지만, 작년에도 이 맘때 만들었으니 올해도 만들 수 있겠지. 버터는 집에 있었고, 밀가루는 부족하여 현미가루를 섞었다. 그리고는 찹찹찹찹. 파이 종류는 작업 중간중간 냉장고에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 버터가 녹아 밀가루에 섞여버리면 안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차갑게, 늘어지기 전에 작업하고 조금이라도 늘어지는 기색이면 얼른 차가운 곳에 넣어야 한다. 중간중간 생기는 반죽의 휴식시간이 너무 애매했다. 밀가루와 버터가 튄 옷으로 집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천상 주방에만 있어야 할 것 같아 내친김에 냉장고를 털어본다.
요리를 하며 책을 보긴 했다. 서서 봤다.
쪼그라지는 애호박, 시든 당근, 한 쪽 남은 양파, 감자 두 알이 눈에 띄어 채를 썰어 모둠 채소전을 부치기로 하였다. 냉동실에서 새우도 꺼내 다져서 반죽에 넣고 계란도 한 알, 부침가루도 크게 두 숟갈, 물도 조금 추가하여 팍팍 젓는다. 잘 섞여야 뒤집을 때 찢어지지 않는다. 새우를 꺼내다가 발견한 순살 가자미로 미역국도 끓인다. 아줌마 8년차가 되니 미역국의 양을 조금 조절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끓였다 하면 한 들통이었는데 이제는 네식구 한번 먹고 한번만 더 먹을 수 있는 양으로 끓인다. 장족의 발전.
과정 샷이 거의 없다. 무념무상 그 자체.
저녁 거리를 준비하며 중간 중간 냉동실에서 반죽을 꺼내 삼절 접기를 해서 밀어 펴고 다시 접고 그리고 다시 냉동실에 넣는 것을 반복 했다. 반죽 밀다가 냉동에 넣고 전을 부치고, 다시 반죽을 밀다가 미역국 간을 보았다. 정말 성질이 다른 두 종류의 음식을 동시에 다루고 있었다.
절대 녹아 들어 섞이면 안 되는 파이 반죽. 최대한 작게, 잘게, 짧게 수그려서 밀가루, 계란, 물과 함께 휙휙 섞여야 하는 채소전 반죽. 같은 반죽인데 이렇게 달랐다. 파이 반죽의 버터와 밀가루는 확실한 본연의 영역을 구축하여 융화를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오븐에 들어가 버터가 녹으며 밀가루 사이의 간격을 벌려 파삭하고 결이 살아있는 파이가 완성된다. 채소전의 재료들은 뭐 하나라도 모나면 안 된다. 모나면 찢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작고 일정하게 계란과 밀가루 물을 이용해 서로의 사이를 끈끈히 붙여야 한 장의 전으로 태어난다.
만들때마다 모양이 다르다. 아마추어 홈베이커의 한계.
나는 어떤 쪽일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사실 파이가 되어야 할 파이 반죽인데 뜨거운 열(불)을 내뿜으며 살아 흐물흐물 해져 파이의 결과 식감, 버터의 향을 다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잘게 썰리지 못한 채소전 반죽의 모난 채소일까.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 집 두 아들녀석들 생각도 났다. 큰 아이는 냉동실에 들어가 홀로 나를 더 단단히 굳혀야 하는 파이 반죽 쪽이고, 둘째는 이 친구, 저 친구 다 같이 어울려서 지글지글 함께 놀아야 신나는 채소전 반죽 쪽이다.
오늘의 한 상. 수고 했다. 나 자신.
그러다 보니 걱정도 된다. 파격은 매도되고, 획일만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우리의 개성 넘치는 반죽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안심도 된다. 버터가 좀 늘어져 결과 식감이 조금 죽더라도, 모난 채소가 섞여서 조금 찢어진 전이라도 NO MATTER WHAT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맛 좋은 음식이 완성된다. 그저 열심히 만들면 그 뿐. 완벽하지 않았지만 엄마 손 파이도 맛있었고, 미역국에 채소전도 맛있었다.
오랜만에 남편이 일찍 와서 네 식구가 평일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다른 것보다 한번에 먹고 한번만 치워도 되는 것이 제일 좋았다.
완벽주의, 까칠한 큰 아이의 작품세계
큰 아이가 유치원 친구들에게 주기로 했다며 합체로봇 세개를 만들었다. 두개 접더니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걸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끝끝내 마감을 시켰다. 힘든걸 참으며 끝까지 마무리 하는 형아에게, 내일 다 못 주면 그 다음날 해서 준다고 하면 되지 않냐고 융통성을 부리는 둘째녀석이 웃기다. 나와 큰아이는 냉동실 들어가야 하는 차가운 파이반죽, 작은 아이는 여럿이 어우러져 지글지글 놀아야 하는 채소전 반죽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