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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Sep 01. 2022

내가 마는 이유

똥, 그 드러운 정 때문에 .



남의 밥, 잠, 똥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하루도 남의 밥, 잠, 똥을 생각 하지 않은 날이 없다. 내가 낳은 아이들의 의식주는 응당 나의 관할이다. 그 작은 사람들은 아직 미숙하여 스스로 밥, 잠, 똥을 해결하지 못 하니 나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그 중 인풋에 따라 아웃풋이 너무나 달라지는 밥과 똥은 항상 나를 옭아맨다. 나몰라라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방임이고, 직무유기일테니. 

아이들의 미각은 어른의 미각보다 훨씬 연하고 예민하여 채소의 쓴 맛을 더 강하고 선명하게 느낀다고 한다. 아이들이 채소를 거부할 때마다 나는 어느 약초를 갖다가 삶고 데치고 무치고 볶아서 나에게 먹으라고 하는 상상을 하며 그 거부를 받아주는 편이다. 하지만 마냥 안 먹일 수만은 없다. 아웃풋이 외친다. 채소 좀 먹이라고. 

돌돌 말아 김밥.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들에게 채소를 먹이는 방법은 볶음밥, 죽, 만두, 전, 그리고 각종 말이들이다. 나는 김밥도 말고, 계란도 말고, 최근에는 연어도 말고 오늘은 베이컨을 말았다. 애들이 어릴 떄는 나 혼자 했는데 이제는 조금 커서 함께 한다. 말이 함께지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 하는 것에, 아이들이 함께할 멍석까지 펴 드려야 해서 나는 더 번거롭지만, 요리 하는 과정에서 만난 채소들에게는 확실히 적대감을 푸는 경향이 있어 할 수 있는 건 함께 하는 편이다. 함께. 라고 쓰고 독박 이라 읽는다. 


거의 매일 먹는 계란. 계란 알러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계란말이는 우리집 단골 반찬이다. 계란을 한 열개쯤 풀고 이런저런 채소들을 다져 넣어 뚱뚱한 계란말이를 만들거나, 날씬한 계란말이를 여러 개 만들어 냉장보관 했다가 한 두개씩 꺼내어 아이들 식판 위에, 아니면 밥 위에 올려준다.  그렇게만 먹여도 마음이 조금 낫다. 단백질에 섬유질을 섭취 할 수 있으니. 그것도 맛있게, 수월하게. 


남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밥을 싼 날. 맛있다고 물개박수 쳐줬건만, 칭찬은 남편이 김밥을 또 싸게 하지 않았다.


김밥은 애들하고 같이 만다. 들어가는 채소들을 소개해주고 밑간 한 밥도 먹어보게 하고 선심쓰듯 햄과 맛살을 한 개 집어먹게 해 주면 각종 속재료들을 넣어서 김밥을 만다. 아직 능숙하게 말진 못하는데 오므리는 것만 조금 도와주면 얼추 한 줄을 완성하고 두줄 정도를 자기 손으로 싸서 그 자리에서 썰어 먹고 일어난다. 그렇게 하면 배부르게 잘 먹기도 하고, 준비하는 수고가 들어서 그렇지 먹이는 수고는 덜 들고, 각종 재료들을 골고루 먹고, 재미있게 시간도 훅 가니, 나는 김밥 준비 정도는 어지간 하면 흔쾌히 해준다. 


코스트코에서 산 38,000원 어치 연어로 온 식구 포식.



최근에는 연어도 말았다. 큰 아이가 작년부터 연어회와 연어 초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파는 초밥에는 와사비가 들어가니 집에서 만들어 먹인다. 빼 달라고 요청해도 되지만 번거롭고 무엇보다 비싸다. 코스트코에서 연어를 한 팩 사다가 다시마에 꽁꽁 싸서 숙성 시켜 얇게 썰어 초밥과 함께 채소 조금 넣어 돌돌 말아주니 잘 먹는다. 나도 연어를 좋아하는데 아이 덕에 자주 먹을 수 있다. 참고로 초밥엔 설탕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간다. 



채 썰어 볶아 준 아스파라거스를 잘 먹었다.



https://brunch.co.kr/@niedlich-na/24


오늘의 베이컨 말이는 아스파라거스를 먹이려 한 것이었다. 최근에 칠면조 (토종닭) 구이를 했을 때도 눈으로 보기만 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하던 아스파라거스를 꼭 먹이겠다. 오기가 생겨 가늘게 채쳐서 익숙한 양파 당근과 좋아하는 베이컨에 돌돌 말이를 하자 하니 좋다 하고 달려든다. 아이들과 돌돌말아 에어 프라이어에 놓고, 열을 올리기 전에 내가 베이컨 말이가 풀리지 않도록 치즈로 살짝 마감을 하였다. 한입 사이즈 보다는 큰 것 같아 가위로 반 잘라주려 하니 한 입에 쏙 먹으며 잘라주지 말라 한다. 아스파라거스, 양파, 당근, 치즈를 품은 베이컨 말이는 맛이 참 좋았다. 맛이 없을리가. 


물가 실화냐.


돌돌 말아 베이컨을 먹고 나더니 둘째녀석이 내일은 돌돌 말아 김밥을 해 먹자고 한다. 그럴 줄 알고 오늘 지단을 부쳐놨다. 무슨 속재료를 준비할까 고민하는데 요새 물가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초록색을 넣어주고 싶은데, 시금치고 오이고 너무 비싸서 그냥 우엉으로 정했다. 내일은 우엉이를 소개해줄께. 우엉 넣은 김밥을 아이들과 만드는 건 처음 일테니. 


나는 돌돌 만다. 아이들의 아웃풋을 위해. 내가 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이 미숙한 작은 사람들에게는 채소가 더 쓰다고 하니, 내 손 공을 들여서 맛있게 해 줘야지 어쩌겠나.  



밥 준비를 하며 오늘의 글 제목을 내가 마는 이유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니 옛날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극본, 노희경)에 나오는 욕쟁이 할머니의 찰진 대사. 나는 말이다, 정이란 똥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오는 똥 못 막듯이 가는 정 못 막는거야, 이년아. 내말이 틀리냐?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 아뇨, 정보다 드러운게 어디 또 있을라구. 이 대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맞다. 

똥때문에, 정때문에. 나는 만다. 

그게 바로 내가 마는 이유. 




많이도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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