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찍소리 않고 포켓몬 색칠공부를 하던 큰 아이가 울먹이며 나타났다. 나는 얘가 울면 겁이 덜컥 난다. 또 왜?
색칠하는데 삐져 나왔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망쳤다고. 좀 갖고 와 보라고 하니 가관이다. 내가 노안이 왔나 싶을 정도로 뵈지가 않아서 도대체 어디? 그러니 작은 구석을 가리킨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하나. 아무도 모를 티끌에 자기 혼자 울고 있다. 울거면 혼자 울지, 왜 나를 붙잡고 우는지.
저 부분이 마음에 안 든다 한다. 내가 돋보기를 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던 순간.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종이를 접을 때도, 똑바르지 않다며, 비뚤어 졌다며, 마지막 마무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운다. 뭘 이런 것 같고 울어! 애도 아니고! 라고 말 하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울 일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판단할 문제이고, 얘는 아직 애다. 일곱살. 그러니 나는 그렇게 말 하면 안 되지만, 할 때도 있다. 참아질 때도 있고.
엄마가 금방 안 도와주니 지 딴엔 지우개로 지워봤는데 더 번져서 절망섞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나는 그때 몹시 집중하며 호두파이 레시피를 연구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굽던 호두파이의 맛을 찾아서 말이다. 엄마는 호두파이를 십년 넘게 구우셨는데, 가게를 하실 때는 레시피 북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냥 외워서 구우셨고, 가게를 접으며 미련없이 레시피 북을 던져 버리셨다. 가게를 닫은 후로도 한동안은 가끔씩 파이를 굽던대로 구우시긴 했는데, 그것도 벌써 십년 전이고 이제는 만사가구찮다며 김치도, 불고기도, 곰탕도 홈쇼핑에서 주문해서 드신다. 내가 레시피에 대해 물어보긴 했는데 이 날 저 날 다 말이 다르셔서 그냥 내가 연구 하고 있다. 엄마 나름대로는 열심히 기억해서 말해주긴 했다. 버터 한 박스에 밀가루 한 포대, 아니 두 포대? 이런 식으로.
그래서 내가 스스로 연구한다. 다른 사람들의 레시피를 보며 우리 엄마가 넣지 않던 재료들은 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쿠키, 머핀 레시피와 우리엄마의 쿠키, 머핀 레시피를 비교하며 설탕의 비율을 따져보고 호두파이 레시피에서도 비슷하게 설탕의 양을 잡는다. 호두파이는 달콤함, 바삭함, 고소함(느끼함)의 황금비율이 맞아야 한다. 파이 반죽을 타르트 틀에 붙이고 적당량의 호두를 넣고 파이필링 이라고 부르는 달걀물을 채워 구우면 달걀물이 푸딩처럼 되며 호두와 같이 씹혀 부드럽고 고소한 맛있는 파이가 되는데, 엄마는 그 레시피를……..
아무튼, 유투브와 블로그를 보며 레시피를 쭉 나열하여 적었고 평균을 뽑아내어 우리 엄마의 설탕비율로 고쳐가며 30년만에 비례식을 쓰고 있었는데 이 놈이 나타나 색칠공부 때문에 나를 들볶으니, 정말 치솟는 짜증을 가까스로 눌렀다.
근데 너 이름이 뭐니?
자, 네임펜을 가지고 와서 두껍게 테두리를 고치고 색칠을 조금 더 진하게 하고, 가위로 테두리에 꼭 맞게 잘라내자. 운다고 될 일이 아니고 고치면 되지, 엄마가 새로 뽑아 줄 수도 있지만, 어떻게 이럴 때마다 새로 뽑니,(너는 맨날 이러는데) 문제를 해결 하는 법 (니 성질을 죽이는 법)을 배우는 거야.
그날 밤에 호두파이를 구웠다. 속에서 쏟아지는 천불을 가까스로 참았더니 냉동실에서 꺼낸 파이 반죽의 차가운 감촉이 좋았다. 쓱쓱 밀고 굽는다. 호두파이는 완전히 식은 후에 잘라야 덜 부서지고 예쁘게 잘리니, 내일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오밤중에 오븐을 돌렸다.
호두파이는 언제나 먹음직스럽다.
처음 구워 낸 파이, 신랑에게 물어보니 맛있다 한다. 신랑은 뭐든 맛있다 한다. 나도 맛있긴 한데 파이 필링과 호두의 비율이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필링이 적어 뭔가 뻑뻑한 느낌이다. 호두를 10 그램 줄이고 파이 필링을 조금 더 늘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에 다시 구워봐야지. 다시 비례식 시작.
두 번째 구워낸 파이!! 짜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파이 만들 작정을 한 날, 파이 반죽을 넉넉히 만들었다. 내 성격을 내가 잘 안다. 그날 밤 아이들을 재우고 좀비 처럼 기어나와 파이 반죽을 밀고 다시 구웠다. 보기엔 첫 번째 보다 더 좋다. 호두와 필링의 비율이 내 기준에서는 좋아졌다. 그런데 신랑은, 어제 버전이 더 맛있다고 한다. 그게 더 달다고. 나는 조금 더 달콤한게 좋다고. 그러고 보니, 파이 필링이 많아지며 파이가 너무 달아질까봐 설탕양을 조금 더 줄였는데, 당돌이 신랑은 그걸 귀신같이 느낀거다. 그래. 파이는 내가 다 먹을 게 아니고 선물 할 일도 많은 거니까 좀 더 달아서 대중적인 입맛을 갖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렇게 잘 구웠는데 맘에 안든다고 다시 굽겠다 하는 나는, 색칠공부 하며 짜증내는 큰아이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다. 마음을 알아주고 같이 극복해보자 하는 수 밖에.
파이를 두 판이나 구웠는데, 그것도 이렇게 근사하게 구워냈는데 나는 여전히 맘에 들지 않는다. 한 두번 더 구워볼 생각이다. 색칠공부를 하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울먹이는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네가 이런 마음 이었겠구나. 아직은 어려서 엄마를 들 볶으니 유감이지만, 조금 더 커서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알고, 혼자 해결법을 찾는 경험을 해 본다면, 나쁘진 않겠다. 우리에겐 호두파이 유전자가 있으니, 뭐든 끝까지 제대로 하고싶은 마음을 잘 만 쓴다면, 좋은거야.
종이 접기도 내가 접는 것 보다 더 칼각이다. 저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짜증과 눈물을 견딘 나에게 박수를. 끝끝내 마스터한 너에게 칭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