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기적으로 양파를 잡는다. 굳이 잡는다라고 하는 건 정말 하루 날을 잡고 중자 크기 이상의 양파를 열개도 넘게 사용하기 때문인데 양파를 큰 망으로 사서 이렇게 잡아 놓고 몇 개만 생 양파로 남겨 두면 버리는 것, 무르는 것 거의 없이 다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음식에 들어가도 남겨서 버리기 일쑤인 양파이지만 물러서 버리는 것과 음식에 사용하고 나서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양파의 변신. 두시간이 넘게 걸린다. 화장으로 치면 신부화장 수준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양파를 대량 볶는 날이 있다. 찜통에 가득 양파를 썰어 넣고 기름을 두르고 달달 볶는다. 양파가 투명해지다가 수분이 빠지며 하얀 즙이 나오고 그러다가 갈색으로 쪼그라들어 익을 때까지 두 시간은 걸리는 작업이다. 부피가 5분의 1 정도로 줄어드는 것 같다. 이걸 큐브에 얼려 두었다가 여기 저기 짜파게티, 스파게티에 넣어 풍미를 올리기도 하고 볶음밥 계란말이 등등에 넣을 채소가 마땅치 않을 때에 꺼내어 넣기도 한다. 이것만 있으면 깊은 맛의 카레를 뚝딱 만들어 낼 수도 있다.(따지고 보면 뚝딱은 아니지만) 매운맛이 완전히 빠지고 단맛이 최고조에 이른 쪼그라든 양파는 아이들에게 쉽게 많이 먹일 수 있어 품이 들어도 종종 하는 작업이다. 볶을 때마다 나쁜 남자 길들인다고 상상한다. 내 눈물 쏙 빠지게 하는 나쁜 놈을 달달 볶아 스윗하게 만든다. 어쩌면 나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하는 중이다.
눈이 너무 매워 둘째의 물안경을 빌려썼더니 눈이 하나도 안 매웠다. 엄마에게 물안경을 뺏기고 스파이더맨이 되어 돌아온 아이.
얼마 전 또 양파를 대량 잡았다. 나는 매실청처럼 양파청을 만들어 요리에 사용한다. 매실청은 양가 어머님들께 항상 얻어먹으니 한 번도 집에서 만든 적은 없는데 양파청은 얻을 데가 없어서 내가 만든다. 설탕은 비정제 갈색 설탕과 흑설탕을 반반 섞어 까맣게 만드는 편이다. 그러면 보통 간장 베이스의 반찬이 많은 우리 집에서 음식을 더 까맣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 먹음직스러워 보이고 간장을 조금 덜 넣게 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만드는 방법은 그냥 양파를 썰어 넣고 설탕을 동량 아니면 약간 적게 넣어두면 알아서 물이 빠지며 설탕이 녹아 양파청이 된다. 이건 한 번 만들어 두면 정말 한참 동안 먹을 수 있어 아이 낳고 세 번 밖에 안 만들었다.
점점 물이 빠진다.
양파청은 새콤한 맛 담당이 아니고 달콤한 맛과 색깔, 수분 담당이라 너무 익어 신맛이 나기 전에 양파를 건져 내고는 냉장고로 옮겨 둔다. 그러면 각종 고기 요리, 조림, 볶음, 등등 단맛이 나야 하는 모든 요리에 사용이 가능한 조미료가 되는데 설탕이나 물엿보다는 양파 물이 섞인 이 액체를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너무 발효되기 전 건져낸 양파 건더기들 먼저 요리에 사용한다. 설탕을 듬뿍 담고 있어, 불고기나 갈비 양념에 넣으면 좋다. 오늘은 어묵볶음을 만들건데 간장과 건져낸 양파만 사용해도 된다.
양파청에서 건져낸 양파는 꼬들꼬들해서 볶아도 맛있다.
우리 집에 발효식품 저장 용기가 생기게 될 줄은 몰랐다. 나중엔 정말 항아리를 살 지도 모르겠다. 절대 할 일 없을 줄 알았던 튀김질을 애들 먹이겠다고 서슴지 않고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언젠간 김치도 담그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나는 김치를 매일매일 먹는 사람이 아니라서 김치는 얻어먹어도, 사 먹어도, 없으면 안 먹어도 그만인데 혹시 아나, 더 아줌마가 되면, 아니 할머니가 되면 저쪽 시골 어디로 고춧가루 보러 다니고 있을지. 마늘과 생강을 한 다라이 놓고 테레비 보며 까고 있을지.
아이를 키우며 밥을 해 먹이고, 이렇게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일, 하지 못 할 것 같던 일들도 하나씩 하나씩 해 가는 과정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 여정이 어린아이들 육아와 요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 공부에 머무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일에 머물렀듯 지금은 내가 지켜야 할 이 자리, 육아와 살림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