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명작동화를 읽으며 아이들이 체리파이가 먹어보고 싶다 한다. 지난번 칠면조에 이어 처음 보는 비주얼의 먹음직스러운 음식 그림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요술 테이블 인가 보다.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명령을 내리면 뚝딱 나오는. 나도 어릴 적 디즈니 동화책을 읽으며 무척이나 궁금하였던 음식들이기에 이번에도 기꺼이 요술 테이블이 된다. 칠면조 구이와 딸기파이를 동시에 차려 낼 수는 없지만 하나씩은 차려 줄 수 있다. 한 번에 한 개만 차려주는 요술, 아니 그냥 테이블.
사실 딸기파이는 구워 보지 않았다. 그냥 엄청 크고 진한 진짜 빅 후렌치파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정량화된 레시피도 없고, 경험도 없으면서, 그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일단 하고 보는 나의 이런 성격은 어떤 면에서는 거침없는 행동파 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겁도 없이 달려드는 위험군 이기도 하다. 나는 운전은 아직도 무서워서 면허 딴 지 12년이 다 되도록 고속도로 데뷔도 못 하고 있으면서 이런데 에는 잘 달려든다. 성공하면 좋은 거고, 아님 말고. 다행히 요즘은 유튜브가 잘 되어있어 관련 영상들을 다양하게, 쉽게, 찾아볼 수 있어 좋다.
외국 할머니들의 파이들. 저 파이가 할머니의 몇번째 파이 일까. 정겹다.
베이킹 관련 유튜브 영상을 찾아볼 때면 외국 영상을 많이 보는 편이다. 전문 셰프들의 영상보다는 정말 홈베이킹의 영상들이 끌린다. 한식의 조리법들이 큰 틀 안에서 비슷해도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 각자의 손 맛과 꿀팁들이 있듯 베이킹도 그런 면에서는 외국 유튜브를 참고하면 좋다.
오래 주방을 지키신 할머니들의 베이킹 영상도 많은데 우리네 할머니들이 반찬 만들 때 양념을 거침없이 쏟아부으시듯 외국 할머니들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쌓인 손 맛, 몸이 알고 있는 계량, 계량이 필요 없는 경험치들을 구경하는 재미, 그녀들이 어림잡아 설탕을 뿌리고 버터를 손으로 뜯어 넣는 장면에서, 고추장 적당히, 챔기름 요맨치 가 오버랩된다. 내가 이것저것 다 써봤지만 이 쇼트닝이 제일 맛있다고 하시는 어느 할머니의 모습에서 다시다 조금 느으야 맛있다고 하는 우리네 할머니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법은 어디 책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마음에 있나 보다. 귀찮음을 누르고 하는 마음, 그것이 오래되면 그 마음이 결국엔 솜씨가 되고 실력이 된다. 그 아름다운 마음들이 쌓인 경험치들. 계량컵보다 정확한 손의 감각 말이다.
I don’t always measure. It’s just a personal preference.
박막례 할머니의 간장 비빔 국수
할머니들의 그냥 하는 요리법은 국 룰, 아니 국제룰인가 보다.
졸일때 퍽퍽 튀어 델까봐 깊은 냄비에 졸였다
딸기파이에는 여러 가지 버전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생딸기 철이 아니니 냉동 딸기로 해야 해서 졸여서 넣어 굽는 방식으로 정했다. 냉동 딸기를 사서 크랜베리 한 줌을 넣고, 흑설탕 두어 스푼 넣고 마지막에 버터와 전분 풀은 레몬즙을 넣어 섞은 후 불을 껐다. 온 집안에 진한 딸기향이 가득하다. 가본 적은 없지만 새콤달콤 만드는 공장에서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잘 식혀 두었다가 아이들이 잠든 밤에 나와서 팬닝 하여 한 판을 구웠는데 아뿔싸, 들고 오다가 쿵 하고 삐끗하는 바람에 파이가 깨져버렸다. 어둔 밤 베란다에 불도 안 켜고 오븐 팬 들고 다니다가 그 사달이 난 건데 어디 안 다치고 깨진 게 파이라서 다행이다 생각했다. 어쩌겠누.
조심하며 졸였는데, 방심하여 깨먹었다.
깨인 파이를 잘 정돈하여 아침으로 아이들과 나눠먹고, 그릇에 옮겨 담아 나의 간식으로 쟁인 후, 딸기를 다시 졸여 두 번째 판을 구웠다. 파이 끝을 더 꼭꼭 누르던지 아님 파마머리처럼 장식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아 조금 들뜬 것 빼고는 맛도 훌륭하고 모양도 이만하면 적당하다. 새콤달콤 딸기 졸임 향에 버터와 밀가루 향이 더해진 근사한 냄새가 집안을 압도한다. 나는 모든 화장품을 향보다 무향을 선호하고, 음식 냄새가 나면 바로 주방 후드를 켜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사람인데, 이 딸기파이의 냄새는 계속 계속 집안에 머무르게 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빅 후렌치파이의 진정한 빅 버전. 친정에 가지고 가 식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두번째 판은 무사히 성공.
디즈니 명작동화는 꿈과 환상의 나라이다. 내가 그랬다. 우리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예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난생처음 보는 음식을 식탁에서 나누는 장면이 나오면 나도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싶던 그 동심을 기억한다. 그 동심이 마흔이 다 된 나를 불러서 디즈니 명작동화 복간판을 새 책 가격에 중고거래를 하였는데, 애들과 여기 나오는 요리들을 해 먹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봉긋하게 솟아 오른 파이를 만들고 싶은데 그 모양은 절대 못 낼 것 같다. 다음에는 더 우아한 장식으로 덮개를 만들어 딸기파이, 베리 파이, 아니면 사과파이를 만들어 봐야지.
그나저나, 내가 할머니가 되면 무슨 음식을 만들고 있을까.
세속에 물든 엄마는 이 귀에서 돈 나오는 당나귀가 갖고 싶다. 디즈니 명작동화는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