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말그대로 죽 쑨 날이다. 우리집의 상비 식품 중 하나가 죽이다. 그때그때 재료에 따라 죽을 넉넉히 쑤어 냉동실에 쟁여두고 아이들 아침으로, 혹은 국수에 곁들이는 음식으로, 혹은 만성 소화 불량 환자=나의 환자식으로 죽은 넉넉히 쑤지만 생각보다 금방 소진된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나는 죽을 쑨다.
죽은 소화도 잘 되지만, 여러가지 재료를, 특히 채소와 고기를 동시에 먹고 먹일 수 있어서 좋다. 거기에 시어머니 협찬 국산 들기름 한바퀴 둘러주면 고소하고 부드러워 꿀떡꿀떡 잘 도 넘어간다. 다른 반찬 필요 없고, 영양소 고루 갖추어져 있고, 아이들이 잘 먹이니 내가 죽을 쑤지 않을 이유는 없다. 가끔 사 먹기도 하는데 먹는 입이 많아지니 집에서 만드는 것이 여러가지 면에서 실하다.
대량 생산 한 소고기 야채 죽.
죽쑤다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곡식의 알이나 가루를 오래 끓여 흠씬 무르게 한 음식을 만들다, 죽을 끓이다. 비유적으로 애써 노력한 어떤 일 따위를 망치거나 실패하다. 라고 나온다.
죽 쑤는 것이 얼마나 정성 들여 온갖 재료를 썰고 다져서 곁에 붙어 서서 저어가며 지키고 주도면밀하게 농도를 관찰해야 하는 일인데, 왜 그것이 애써 노력한 어떤 일 따위를 망치거나 실패하는 일을 지칭할까. 아마도 밥심이 필요한 한국인에게 아직 밥이 귀하던 시절, 밥을 해야 하는데 물을 잘 못 맞추어 질게 죽이 되어버리면 실패한 밥이 되어 버리니 죽쑤다 라는 말은 거기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싶다. 밥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어 죽을 홀대해 버린 관용어. 죽 쑤다. 죽을 쑬 때마다 이런 말들을 생각한다. 밥이 얼마나 큰 의미이길래, 이렇게 맛있고 정성들인 죽이 이런 대접을 받을까 하고 말이다. 밥은 우리말이고 죽 粥은 한자어이고, 미음 米飮도 한자어이다. 밥을 뜻하는 반飯이란 글자가 있긴 하지만, 한국인이 생각하는 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밥심이라고 하는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음식을 지칭하는 말은 밥 말고는 생각 할 수 없다. 식사, 끼니, 모두 어울리지 않는다. 오로지 밥. 아기들이 모두 미음과 죽을 거쳐 밥을 먹게 되는데, 그렇다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미음과 죽만 먹던 시절이 있었을 진 대 그래도 미음과 죽에는 한글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았 다니, 너무 한 거 아닌가. 미음은 그렇다 치고 죽을 이리 홀대하다니.
엄마한테 얻어온 전복으로 만든 전복 죽 한상.
아이를 둘을 키웠더니 왠만한 죽쑤기에는 익숙해졌다. 4-5개월부터 미음으로 시작하여 죽, 진밥, 밥으로 넘어오는 아기의 식사 발달 과정에 맞추느라 아이 둘을 키우는 동안 평생 쑬 죽은 다 쑤었나 보다 했는데 그 놈의 죽 쑤기는 끝이 없다. 다만 이유식을 만들 때에는 월령별 적합한 재료를 따져가며 알맞은 농도와 알갱이 크기를 생각하느라 조금 더 귀찮았지만 지금은 대충 썰어 다지고 푹 끓이기만 하면 되니 조금 편하긴 하다. 더구나 국물로 비비고 사골육수나 시판 육수 한 알을 이용 할 수 있어 훨씬 더 간편하게 맛있는 죽을 만들 수 있어 나도 좋고 애들도 좋다.
죽이 밥이던 시절. 우리 모두 이 시절을 겪었을텐데, 죽쑤다는 너무 심했다.
오늘은 팥죽을 쑤었다. 몸에서 식물성 단백질을 원하는지 지난 여름부터 콩국수, 검은 깨죽, 검은 콩 두유가 그렇게 땡기더니 요즘은 팥죽이 먹고 싶어 지난 번엔 한 번 사 먹었고 오늘은 급기야 팥죽을 쑤었다. 원래는 밥알 안 넣고 새알심만 들어간 팥죽을 더 좋아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로 찬 밥을 한 공기 넣어 만들었다. 팥죽은 애들이 안 먹는 죽이라 잘 쑤지 않고 가끔 먹고 싶을 때 한 그릇씩 사 먹는 정도인데 왠일로 잔뜩 쑤었으니, 냉동실에 넣어놓고 나 혼자 몇 번은 먹을 수 있겠다.
벌써 3년 전, 큰 아이와 동지팥죽을 쑤던 날 찎은 사진이다. 이때만 해도 팥죽을 잘 먹더니 요샌 안 먹는다.
팥죽 쑤는 일도 쉽지는 않다. 삶아서 갈아야 하는 것도 일이지만 젓고 있다 보면 끓으며 사방으로 퍽퍽 튀어서 화상에 주의 해야 하는 것도 있고 잠시 한 눈 팔면 밑이 눌러버리니 정말 변덕이 죽 끓듯 하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어디로 튈지 몰라 긴장해야 하는. 죽 끓듯 하는 변덕 말이다. 일을 그르치다를 뜻 하는 죽쑤다 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변덕이 죽 끓듯 하다는 말은 정말 찰떡이다. 오늘의 죽 쑤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