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
26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입사한 지도 어언 7개월이다.
내가 속한 직무는 무려 10년 만에 신입을 뽑았다고 하고, 그마저도 6명뿐이었다. “요즘 취업이 바늘구멍에 낙타 넣기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는 2년 동안 스타트업, 중견기업, 그리고 지금 다니는 대기업까지 모두 경험했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기업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달려온 2년을 잊기 전에 글로 기록하고자 한다.
물론 회사마다 다르기에, 오롯이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다.
’일단 다녀보지 뭐‘라는 마음으로 입사했던 스타트업에서 눈 깜짝할 사이 1년 3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휴학 없이 졸업을 하고 나니 “취업”이라는 문턱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당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마케팅 회사에서 일했다. 유튜브를 활용한 마케팅을 기획하는 것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은 일손이 부족하기에 내 일, 너 일에 대한 구분이 없다. 입사할 때 팀에는 나랑 팀장님 2명뿐이었고, A부터 Z까지 모든 업무에 투입됐다. 협업사와의 30분 미팅을 위해 왕복 6시간 강릉을 다녀오기도 했고, 기획안 제출 기한을 맞추기 위해 모두가 출근하는 새벽 6시에 퇴근하기도 했다.
높지 않은 연봉과 망가져가는 건강을 무릅쓰고 1년여 동안 버텼던 것은 내가 일을 하며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분야는 없었고, 그 결과는 늘 가시적이었다. 협업 제안에 성공하여 프로젝트를 따올 때마다 팀 구성원들은 늘어났고, 나는 8개월 만에 선임으로 승진했다.
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회사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때때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내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삶은 개구리 증후군” 때문이었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란 천천히 달궈지는 물속에 있는 개구리가 물이 뜨겁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 속한 환경에 차츰 적응하고 안주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쁘지 않은 회사 생활에 안주해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입사 초기 스펙을 쌓아서 더 큰 회사로 옮기자는 목표를 가졌던 나였기에, 1년 3개월 만에 퇴사를 결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두 달 반동안 퇴직금을 쓰면서 쉬고 나니, 다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소기업 상시 채용에 지원했고 운 좋게도 지원한 2~3곳에서 모두 합격 발표를 받았다. 1년 3개월 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참고로 대학 생활동안 나는 대외활동을 단 1개도 하지 않았기에, 이는 오롯이 스타트업 경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합격한 기업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중소기업도 4일 만에 퇴사했다. 4일이라면 너무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회사를 이미 경험했던 나로서 많은 고민 후 내린 결론이었다. 상장한 마케팅 회사였지만 알려진 회사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스타트업처럼 나의 역량을 발휘하기에는 애매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전보다는 체계적인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대기업 공채를 기다릴까 고민하다, 일주일 만에 합격 발표를 받은 모 중견기업 채용연계형 인턴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뭐든 경험이 되겠지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중견기업에서 근무한 기간은 제일 짧기에 중견기업에 대한 내 인사이트는 정확도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확실하게 느낀 점은 회사는 클수록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별 게 아닐 수 있지만 멋쟁이 직장인임을 과시할 수 있는 사원증도 주고, 회사 이름만 말해도 전처럼 어떤 곳인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여행 관련 회사였는데 지역별로 팀이 나뉘어 있어서 업무 롤이 명확했다. 나는 A부터 J까지만 하면 됐다.
사람들도 좋았다. 선배는 몰라도 공채인 만큼 90명 가까운 동기들이 주는 힘은 컸다.
하지만 인턴 생활 3개월 후 정규직 출근 전날 또 퇴사했다.
체계적인 것을 경험하기 시작하니 조금 더 체계적인 업무 환경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계획도 없이 퇴사를 통보했다.
3개월 동안 대기업 공채에 마구잡이로 15곳 정도 지원했다. 결론적으로 서류 합격한 곳은 4곳 남짓했고, 최종 면접까지 단 1곳에 합격했다.
합격 통보를 받을 때 들었던 생각은 ‘내가?’였다. 다 떨어지고 대기업만 붙다니, 취업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올해 1월 중순에 입사하여 4주 동안 계열사부터 본부 교육까지 받았다. 내가 원하던 “체계”가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현업 배치받고 나서는 오히려 너무 체계적이라서 현타가 왔다. 대기업에 들어가면 회사의 부품이 된다는 말, 그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이제는 A부터 C만 하면 된다.
스타트업 때와 다르게 나의 역량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키보드만 뚱땅 치다가 퇴근하는 일상이 너무 단조로웠다. 입사 후 2달 만에 보고를 맡게 되면서 조금씩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시키는 것만 틀에 맞춰서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불현듯 현타가 왔다. 실수를 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업무 시스템들과, 부서별 명확한 업무 R&R은 나로 하여금 대기업의 부품이 된 것처럼 느끼게 했다.
더 이상 커리어적으로 좋은 곳은 없었고, 목표가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었다.
어린 물고기는 나이 든 물고기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전 바다라고 불리는 엄청난 것을 찾고 있어요." "바다?" 나이 든 물고기가 말했다. "그건 지금 네가 있는 곳이야." 그러자 어린 물고기는 "여기는 물이에요. 내가 원하는 건 바다라고요!"
디즈니 영화 소울에서 뮤지션의 꿈을 이루고 허무감을 느끼는 주인공 조가 들은 말이다. 나는 조처럼 대기업이라는 물에서 바다를 찾는 어린 물고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물고기에게 바다보다 좋은 환경은 없었기에, 또 다른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많은 히스토리를 가진 대기업인 만큼 내가 업무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양이 방대하다. 이미 갖추어져 있는 업무 R&R 덕분에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하루종일 마우스를 딸깍거리기만 해도 선배들은 기다려주신다.
이처럼 천천히 업무를 익혀나갈 수 있다는 것이 대기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대기업 신입” 역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수행하고 있다.
환경이 달라지면 역할이 달라지기에 나의 역할이 미미하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2년간 열심히 일궈 온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보상 또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즐기고 있다.
대부분의 취준생들이 대기업을 목표로 취준 하지만, 사실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작은 회사에서 시작해서 기업 규모를 키워가면서 이직을 하는 것도, 오히려 내가 업무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물론 대기업의 혜택과 복지는 타 회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고, 7개월 차 신입인 나는 이에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이지 않은가?
스타트업은 스타트업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 만족스럽고, 중견기업은 중견기업대로 적당한 워라밸에 만족스럽다.
그래서 회사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더군다나 스타트업 혹은 중견기업을 경험한 나 같은 중고신입은, 대기업의 복지를 더 잘 체감하고 이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어느 환경에 있든 나를 즐겁게 하는 요소들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 현재 환경에 안주하지 않는 것,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욕심을 가지는 것.
그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