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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가나나 Feb 13. 2021

따듯한 뱅쇼와 함께

할 일없이 쉬는 백수다 보니 느는 건 잠과 술뿐이다. 어제도 남편과 소주를 나눠 마셨다. 원체 술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소주를 탄산수에 희석해 음료처럼 마신다. 그렇게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나도 모르게 '취했나?'싶은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바로 잠자리에 들거나 음악을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춘다. (춤도 아닌 그냥 몸부림??) 어제도 과했다. 탄산수도 소주도 넉넉했으니 취했구나 싶을 만큼 마셨다.


12시쯤 잠들어 아침 9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싶어서 떴다거나 '일어날 때가 됐군'이라는 자의에서라기 보단 9시에 열리도록 설정해둔 자동 커튼이 열렸고 평소보다 강렬한 밝음에 눈이 떠졌으니 타의에 의해서였다. 더 자고 싶어 극세사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봤지만 벌써 깨버린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별수 없이 거실로 나왔다.


거실도 밝음이다. 창밖은 하얀 안개가 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햇살이 들 때보다 더 환하다. 빛으로 거실 불을 켜는 센서도 오늘은 밝음으로 인식했는지 집안의 조명을 하나도 켜놓지 않았다. 공기 중의 미세한 방울에 햇살이 비춰 이토록 밝은가 의아했다. 그리고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먼저 일어나 거실에 앉아 있던 남편이 인상을 쓰는 내게 물었다.

"배 사러 갈까???" (여기서 말하는 배는 당연히 먹는 배다.)

"아... 머리 아파.. ㅠㅠㅠ"

"옷 입어 배 사러 가게."

마트에 들렀다. 배만 사서 나오려고 했는데 마트라는 곳이 쉽게 원하는 물건만 콕 집어 나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은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과일을 집어 들고 계산대까지 이동하는 5분 남짓한 순간에도 우리는 진열대를 지나며 사지 않을 물건을 만지작 거린다. 그러다 눈에 띈 '와인 3800원'

"오빠 뱅쇼 만들어줘."

"안돼 술 먹어서 머리 아프잖아."

"뱅쇼는 술 아니야 숙취해소 음료라고 생각해줘."

".... 안돼"

"3800원 밖에 안 하잖아~~~"

"하나사..."

결국 배를 사러 가서 와인까지 업어 오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집에 와서 맛탱이가 갈듯 말듯한 귤과 배를 깎아 넣고 계핏가루, 설탕을 넣어 뱅쇼를 끊인다. 달큼한 와인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한데 콧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알코올 향이 좋지만은 않다.

남편이 와인 끊이는 냄새에. "우리 집에 술꾼이 사는 줄 알겠군..."이란다.


백수라 느는 건 술뿐이니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것 없다. 따끈한 뱅쇼는 30분 만에 완성됐다. 알코올이 날아간 와인인 뱅쇼는 감기에 좋은 음료라는데 술안주로 딱인 탕수육과 함께 먹는다. 맥주를 마실까?? 고민하면서.

안개는 어느새 걷히고 반대편 아파트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하늘만은 뿌옇다. 높고 맑은 하늘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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