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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가나나 Feb 08. 2021

아들 귀한 집에서 살아남기.

"형제관계가 어떻게 돼세요?"라는 질문에 "1남 4녀요"라고 답하면 모두 어떤 집인지 알듯한 표정을 짓곤 "아들이 막내죠?"라고 묻는다. 요즘은 나이, 학력, 가족관계를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 묻지 않지만 난 20대 초반까지도 자주 들었던 질문이다.


첫 직장 생활을 했던 곳에서도 내게"아유, 어머님이 고생하셨겠네."라는 질문했고 그럴 때마다 난"저도 고생했는데요."라고 받아쳤다. 아들 귀한 집에 막내가 아들이면 딸들도 고생을 한다. 엄마는 그렇게 귀한 아들을 낳고 그동안 아들 못 낳는다고 구박한 고모에게 아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걸로 복수를 했다지만 난 그조차도 하지 못했다.


아들이 없는 집에서 태어난 나는 돌사진도 남자 한복을 입고 찍었고 주변에서는 "니가 고추여야 했는데."라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장래희망란에  '남자'라고 적었을 정도니 어린 가슴에 "남자"라는 성별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는 주변에서 "니가 고추여야 했는데."라는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았지만 딸과 아들의 차별이 시작됐다. 남과 여의 차별이 아닌 엄마에게서 받는 애정의 차별은 어른이 된 지금도 내 마음을 시리게 한다. 간혹 '피자나 치킨이 먹고 싶을 땐 남동생에게 "엄마한테 피자  사달라고 해"라고 시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남동생의 요구 사항을 하나씩 들어줘야만 했다.'는 따위의 에피소드를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남동생과의 싸움에서 부모님이 남동생 편을 들었다거나 무조건 적인 양보를 강요했다와 같은 행위보단 '엄마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와 '자식에게 거는 당연한 기대와 거기서 비롯된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는 확신에서 오는 불안정감과 그런 감정에서 비롯된 부정의 감정은 인간관계를 맺고 이어가는걸 힘들게 했다. 어쩌면 남자로 태어나야만 했던 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마주해야 했던 녹록지 못한 주변 반응 때문에 어떤 피해의식에 의해 생긴 감정이지 않을까에 대해 성인이 돼서는 고민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이나 추억조차 제대로 공유할 수 없는 차별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는 걸 보면  불안정한 감정에서 비롯된 부정의 시선은 내적인 피해의식보단 부모에게서 균등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서 오는 '애정의 결핍'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우리 아들, 우리 아들'하는 엄마를 보며 입을 닫게 된다거나 간혹 "누나들이 아들 장가갈 때 집 한 채는 해줘야지"라는 말을 들을 때면 '우린 땅 파면 돈나 오는 줄 아나...'라는 속엣말을 하고, 2만 원짜리 보온병을 사 온 아들에겐 "아이고, 우리 아들뿐이네."라고 하면서 10만 원 용돈을 준 나에겐 "홍삼은 없나?"라고 묻는 엄마를 보며 10손가락 중에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그건 분명 '아들 손가락'일 거라 생각하게 한다.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딸 많은 집 아들로 태어난 내 남동생도 힘들지 않았을까.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망'으로 똘똘 뭉친 우리 집에서 엄마 남동생의 탄생으로 비로소 어깨에 뽕 좀 넣고 걸을 수 있게 됐으니 그 아들사랑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막내인 남동생은 무조건 '아들, 아들'하는 엄마의 장단을 맞춰주느라 어떤 사명감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는 20대의 남자 집에 한 달에 두 번씩 찾아오는 엄마를 맞이하는 것도 버거운 행복일지도 모를 일이다. 남동생은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엄마를 맞이하고 찾아오는 엄마를 절대 빈손으로 내려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도 한 집안의 장손으로서 느끼는 책임감과도 맞물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4명의 딸보다 훨씬 살가운 아들 한 명인 것 같아 '우리 엄마 아들, 아들 하더니 아들 하나는 잘 키웠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두 '언니, 언니'하는 딸 넷이 있는 집에서 아들로 태어난 막내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우리를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라고 살갑게 부르는 남자 동생이 싫지 않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엄마는 '언니'라고 하는 남동생에게 '누나지 고추땔래' 라며 남자라는 점을 항상 강조했다. 남동생은 형제는 많았지만 동일 성별에서 나누는 공감대를 나눌 수 없었고 아들과 딸이라는 차별 속에 생기는 여자 형제들만의 연대도 없었으니 함께 하면서도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남동생은 누나가 많으니 섬세했고 다정다감하고 자상했다. 키도 작고 매력도 없는 것 같은데 여자 친구는 곧잘 사귀었는데 다정한 성격이 여자를 만나는데 한몫 단단히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이야기가 나올만할 때쯤이면 헤어졌고 그걸 보며 '여자 많은 집에 시집가는 거 아니다.'라는 옛말은 몇 세대가 교체된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역차별의 대상이었던 남동생도 그 차별 속에서 나와는 또 다른 고민과 결핍을 느끼고 있었을걸 생각하면 내가 무조건적인 피해자도 아닐 것이다.


남자 귀한 집 딸이나, 딸 많은 집 아들이나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달고 쓴 것 가리지 않고 모두 담아 버릴 큰 그릇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릇 조차 없었다면 난 늘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아들, 아들, 하는 엄마에게 애정을 구걸했을 테고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나의 남동생을 벌써 엄마를 떠나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남동생의 키가 우리를 넘어섰을 때나 주먹이 꽤 단단해졌을 때도 누나 말에 토 달지 않고 무서워하는 척이라도 해줬던걸 보면 아빠와 엄마가 차별을 하면서는 키웠었도 위, 아래가 없게 키우진 않았구나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키우던 시대는 '부모교육'이라는 것조차 생소했다.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준다는 것이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고 울면 달래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시기였으니 어쩌면 우리가 자라온 환경은 누구보다 자연스러웠고 당연했던 시기였으니 그저 그때 부모의 양육방식을 받아 드릴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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