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청양고추를 샀다. 남편은 고추를 사서 냉동고에 얼려놓고 사용한다. 그래서 한 번 살 때 많이 사는데 이번에 산'청양고추'가 맵지 않다. "반품도 할 수 없고..."라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샀으니 먹어야겠고 별 수 없이 맵지 않은 청양고추는 우리 집 냉동고에 들어간다. 남편은 그 청양고추로 '육개장'을 끓이고는 영 신통치 않다는 표정을 짓더니 집에서 고추를 키워야겠단다.
올해 집에서 고추를 키우게 된다면 재작년에 이어 두 번째가 된다. 재작년에 고추를 키우게 됐던 건 상당한 우연이었는데 우리 아랫집 사람이 고추 모종 두 뿌리를 준 것 에서부터 시작됐다. 키우던걸 밭에서 뽑았다며 두 뿌리를 줬는데 그때 마침 달려있던 고추가 맵고 맛이었고 우리는 시장에 있는 모종 가게에 가서 청양고추 모종 세 뿌리를 샀고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아이스박스를 주워와 베란다에 고추 텃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잘 자라주기를 염원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베란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며 지켜보길 며칠, 고추에 하얀 꽃이 폈다. '저 꽃이 떨어진 자리에 고추가 자라려나 보다.'며 매일 고추가 열렸나 보는데 꽃은 그냥 폈다 지기만 할 뿐 고추는 열리지 않는 이상한 악순환이 계속됐다.
나와 남편은 벌레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 무농약 고추라는 원대한 꿈을 접고 빅카드를 살포. 그리고 고추가 열리기를 고대했으나 끝내 고추는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고추를 키우는 이유는 자기한테 하얀 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며 고추가 열리지 않는 고추를 열심히 돌봤다. 그렇게 여름이 찾아올 때쯤. 퇴근한 남편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면봉을 챙겨 베란다로 향한다. 한참을 스티로폼 텃밭 앞에 앉아 뭔가를 하더니 상당히 자아도취된 표정으로 나와 "암꽃과 수꽃이 있는데 걔네들이 만나야 고추가 열린데"란다. 그렇게 남편은 퇴근 후 베란다에서 암꽃과 수꽃을 짝짓기 시키는 일에 열중했고 우리의 첫 고추 농사는 나름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수확량에 비해 그 번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내년부터는 그냥 사 먹는 걸로 하자고 이야기했었다.
재작년 일을 이야기하며 "고추 다섯 뿌리 짝짓기 시키는 것도 힘들어하지 않았냐."며 반대하는 내게 남편은 "이제 키울 줄 아니깐 세 뿌리만 사도 일 년을 먹을 만큼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스티로폼을 함께 주우러 가지 않겠냐."라고 묻는다. 올 해도 암꽃과 수꽃 짝짓기를 해주는 삼신 할아버지가 될 남편을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터졌다. 하얀 고추꽃도 원 없이 볼 수 있겠구나 싶어 "남편, 하고 싶은 거 다해"라며 쿨 한 척 허락한다.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우리 집 베란다에 텃밭이 생길 예정이다. 남편은 이왕 텃밭 허락을 받았으니 고추만 심기는 싫은지 애플민트도 심어보고 싶다며 인터넷으로 '애플민트'키우는 법을 검색 중이다. 남편은 쉬는 동안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볼까. 고민 중이라던데... 이러다 '귀농하자'라고 하진 않을지 살짝 불안한다. 그래도 오랜만에 즐길 걸이가 생겨서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나고 남편의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