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망자(亡者)의 말
산자도 죽은 자도 함께 지내고 있다.
죽은 자는 저 땅 아래 묻혀 있고,
산 자는 이 땅에서 나는 채소를 먹고 산다.
서로는 어떤 대화를 나눌까?
어이! 잘 지냈는가?
그래 사는 게 어떠신가?
무슨 일 하며, 무슨 낙(樂)으로 살아가는가?
돈 좀 버셨는가? 어디 벼슬은 하셨고?
아 이 사람, 아무 소리도 안 허는 거 보난
거기 살 때 내 팔잔가 보군.
이 사람, 울상 지을 필요 하나 없네 그려
죽어보니 알겠더군.
내 옆에 있는 정승이나, 나나
땅 속으로 들어와서는 그냥 한 줌 흙 돼부난게
뭐 그리 애써 살려들지 말게나.
거기 있을 때 실컷 즐기게나.
재상 되면 뭐 하겠나, 나그네 되어 실컷 놀아 다니게나.
어르신, 거기 땅 속엔 지낼 만하신지요.
땅 밖엔 말도 많고, 탈도 많은데
그 안에는 평안하신지요?
아하, 여보게, 어차피 들어와 보면 알 일
거 사는 동안 좋은 일 많이 하고,
남들 이러쿵저러쿵 일절 신경 쓸 것 하나 없으이.
사람 많이 좋아하고, 곁 사람 마냥 사랑하게나.
여긴 나눌 이 없는 거이 하나 아쉬워
떠난 사람 아쉬워 말고,
있는 사람에게 마냥 잘해주게
어이 친구, 그리고 잊지는 말게나.
흙 속에서 나왔다가 다시 흙 속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사실 꼭 기억하게나
그럼 나중에 봄 세.
(2025. 9. 17)
2025년 9월 17일 수요일
가을입니다. 협재의 가을아침은 제비의 등장에서 시작되네요. 여름 내내 보이지 않던 제비가 저공으로 날다가 전기 줄에 앉아 있습니다. 그동안 이 작은 새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어렸을 때 우리 집 처마 밑에 둥지를 트고, 시끄럽게 울어대던 이 새를 거의 40년 만에 여기서 봅니다. 아파트가 싫어서 이들은 바다를 건너 제주로 왔나 봅니다.
또다시 올레길이 시작되었습니다. 11코스는 17.3km, 5~6시간이 소요되는 비교적 긴 코스입니다. 책을 보면서 약간 걱정되는 부분은 이 코스에 천주교공동묘지를 지난다는 점인데, 여자분들은 놀날 수 있다고 표현되어 있네요. 겁 많은 저는 은근 걱정됩니다. 간밤에 여러 가지 꿈을 꾼 것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여하튼 호흡을 크게 내쉬고, 담대히 걸어갑니다. 202번 버스는 하모 2리(서귀포 방면)로 힘차게 달려갑니다. 아름다운 가을하늘과 바다는 한 폭의 수채화입니다.
한 달 전 10코스를 끝낸 지점에서 11코스를 시작합니다. 도보자는 하모체육공원 앞에 와 있습니다. 08시 02분, 올레 11코스를 걷습니다. “부엔까미노, 이 길 위에 축복이 있기를”
모슬포
모슬포는 대방어가 유명합니다. 11월 모슬포에서는 방어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방어는 육질이 졸깃하고, 살살 녹습니다. 고등어회와 함께 드시길 추천드립니다.
멀리 보다 보면 가까이 있는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근거리에 있어서 사람들 눈에서 멀어졌던 들꽃들을 찍고 갑니다. 아는 애도 있고 모르는 애도 있으나 한결같은 은은한 향기로 도보자를 반기네요. “안녕! 반가워. 여기서 만나 반갑고, 이젠 꼭 기억할 게 몰라봐서 미안”
모슬봉오름길
9시 정각, 도보자는 이제 오르막을 올라갑니다. 모슬봉이 눈앞에 있습니다. 반쯤 올라왔을까요? 한 무리의 병사들이 훈련 중이네요. 땀을 엄청 흘리고 있습니다. 가져온 초코바와 비스킷 두 개를 맨 끝에 있는 병사에게 주고 갑니다. 내가 군 생활 하던 때와 얼마 전 아들을 군에 보낸 친구가 생각나네요. 저들도 언젠가 내 나이가 되겠지요. 아름다운 청춘이여! "네, 감사합니다." 어린 병사의 음성이 뒤에서 울려옵니다.
모슬봉 오름길에는 묘지가 참 많네요. 묘들은 한 결 같이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바다는 망자들의 고향인 것 같습니다. 어두운 숲길을 걷는데 갑자기 흰 짐승이 뛰어옵니다. "앗 깜짝이야" 목줄이 보입니다. 흰색 개네요. 묘지 옆에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망자의 길
모슬봉은 양지와 음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볕이 따뜻한 양지에는 망자들이 잠들어있는 묘가 있고, 음지는 산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걷다 보면 푸드덕 꿩이 날아오르고, 컹컹하고 들짐승 소리가 들린다는 점입니다. 놀라지 마시기를, 살아있기 때문에 들을 수 있고, 살아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 다 담지 못하는 이 아름다운 모습들을 스치듯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훌쩍 지나가는 것이 또한 인생이기도 합니다. 오로지 계속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묘지(가족묘)가 너무 많아서 사진에 담기 힘듭니다. 하산 길에는 온통 묘지입니다. 어떤 곳은 집단묘지인데 비석 맨 위만 남아있고, 봉분은 다 흙에 파묻혀 있기도 합니다.
도보자는 천주교 성당묘지로 향합니다. 성당묘지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밭과 묘지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죽은 망자가 살아있는 제게 바람 속에서 말을 건네네요.
올레 길을 살짝 이탈하여 정난주 마리아 성지를 방문해서 잠시 묵도합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황사평의 부인이도 하고,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한 당대의 최고 실학자 정약용이 그녀의 숙부이기도 합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남편이 순교하자 두 살 난 아들을 추자도에 유배 보내고, 제주에 관비로 살면서 37년간 신앙과 인내로 삶을 이겨냈습니다. 그녀는 백색 순교자로 불리며,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진 곳을 제주말로 ‘곶자왈’이라고 합니다. 지금 도보자는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 신평~무릉사이 곶자왈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 길을 1시간 넘게 걸어왔는데, 햇빛이 들지 않아서 시원했지만 비가 와서 길에 웅덩이가 많아 미끄러워 힘겨웠습니다. 특히, 자갈이 많아서 도보자처럼 바닥이 얇은 신발을 신으신 분들은 힘들 것 같습니다. 왼쪽 발바닥이 아파오고, 길이 습해서 버섯을 보거나 뱀을 두 번씩이나 만나기도 했습니다. 왼쪽 발바닥, 어깨에 통증이 오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네요. 오래간만에 걸어서 그런지 상당히 힘이 듭니다.(15.8km)
13시 40분, 최종 목적지 무릉외갓집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제주에서 생산되는 제철 먹 거리들을 파는 곳인가 보네요. 점심도 못 먹었는데, 주변 식당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쉬운 데로 빵과 감귤주스로 고픈 배를 충전합니다.
올레 11코스는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힘든 코스였습니다. 한 달 만에 몸은 걷는다는 느낌을 잊어버렸습니다. 체력이 금세 고갈 되었고, 무엇보다 신발이 자갈밭을 걷기에 불편했습니다. 양쪽 어깨는 여전히 눌림에 힘겨워졌고, 길은 미끄러워 여러 번 넘어질 뻔했습니다. 또 마음으로는 어제부터 공동묘지 길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있었는데 모슬봉 주변은 완전 묘지 밭이었습니다. 잘 정비된 묘지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지나면서도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또 위 詩를 썼던 천주교성당묘지 인근은 특이하게도 묘지와 밭이 같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그다지 멀지 않아 보여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여하튼 여러모로 힘든 11코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