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올레길 (12코스)

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by 밤안개

주말에 웬 비


주말인데 웬 비람

비 오는 게 좋은지 싫은지 생각해 본다

우산이 들어있는 가방이 무겁고

서귀포 가는 버스가 늦어진다

도서관까지 비 맞고 걸어야 한다

어디 나가 밥 먹기도 불편하다


아, 참 주말인데 웬 비람

아내도 나도 비가 굵어지면

꼼짝없이 오후엔 집에 붙어 있어야 한다

산책 안 가면 여기저기 똥 싸는

녀석 뒤치다꺼리도 마냥 귀찮다


아이참, 여태 쨍하다 웬 비람

느릿느릿 버스는 제주 서쪽바다를 돌다가

고산*을 통과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의를 입고 밭을 돌본다

문득 비가 스프링클러 일 수 있겠구나

저 사람들 밭일이 줄고, 작물이 잘 자라겠구나

비 오는 게 좋은지 싫은지 생각하다가

금세 나는 비 오는 게 좋겠구나

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2025. 9. 20.)

*제주 한경면에 있는 동네 이름, 고산리



2025년 9월 18일 목요일

간밤에 천둥 번개가 치더니, 오늘 아침 제주는 여지없이 가을입니다. 점퍼를 찾다가 몇 분 늦는 바람에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습니다. 22분을 더 기다려야 하네요. 추워지면 이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아침 협재는 한 폭의 가을 수묵화입니다.


12코스 시작점까지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협재서 202번 버스를 타서 대정농공단지까지 와서 맞은편에서 761-2번 마을버스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승객이 제가 유일했던 이 버스를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승차합니다.


08시 42분, 좌기동에서 하차했습니다. 여기서 무릉 외갓집까지 6분간을 또 걸어왔습니다. 12코스의 시작점, 무릉 외갓집에서 비로소 올레길을 시작합니다.


출발한 지 30분 만에 평지교회에 도착했습니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해에 이 교회는 설립되었습니다. 김대건신부님의 유물을 볼 수 있는 이 교회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에 하나네요. 교회이름이 참 인상적입니다.


12코스 시작 느낌은 '살아있다'입니다. 11코스의 ‘어둠’이 ‘생동감’으로 바꿔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일구고, 어린 나무를 심고, 무너진 하우스를 고치고, 밭에 약을 뿌립니다. 농민들의 바쁜 일상 속에서 가을은 조금씩 익어가고 있습니다.


4.3km까지 사람 사는 논과 밭길을 걸어왔습니다. 이제 길은 숲으로 들어갑니다. 도보자는 도원연못 옆 숲 입구에 서있습니다. 이 연못은 신도리에 위치한 습지로 철새들이 날아와 겨울을 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밭을 옆에 끼고 도로를 따라 걷습니다. 순간 산티아고순례길에서 만났던 그 도로가 생각납니다. 스페인에서나 제주서나 길은 항상 사람을 설레게 합니다.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말들을 다 들어주고,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 줍니다. 옥수수 잎이 바람에 춤을 추고, 길 위에서 바람은 가을을 노래합니다. 아름다운 가을, 제주의 멋진 길입니다. 녹남봉오름으로 올라갑니다.(5km)


녹남봉은 '녹나무가 우거진 오름'이라는 뜻입니다. 이 오름은 100.4m의 낮은 오름이지만 곳곳에 나무들이 길을 잘 안내해 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0분 정도 올라온 오름에서 제주 서쪽지역의 밭과 비닐하우스, 전봇대, 도로가 보입니다. 과거부터 사람들은 이 평평한 땅 위에서 살가운 삶을 꾸려 나갔을 겁니다.


중간 스탬프 찍는 곳은 옛 신도초등학교 교실 앞입니다. 이 학교는 1998년 폐교되었고, 이후 여기는 ‘산경도예’라는 도자기 체험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담이 제거된 학교에는 잔디가 잘 정돈된 운동장, 이순신동상, 세종대왕동상, 이승복동상까지 옛 초등학교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 함성대신 바람소리만 크게 들려옵니다. 폐교된 것이 무척 아쉽네요. 이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8.6km 지점, 12코스 전체거리의 반을 왔습니다. 바다입니다.

네덜란드인 하멜일행이 풍랑에 표류하다가 이곳 신도 2리 해안가에 이르러 암초에 난파되었고, 그중 28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비(碑)가 여기 서 있습니다.


수월봉을 향해 걷습니다. '논, 밭이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람은 도보자가 걷는 길의 반대 방향으로 불고 있으나 살아있는 사람의 흔적, 스프링클러에서 뿌려지는 물, 새싹들, 그리고 사람 사는 집, 이런 것들이 있어서 역풍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12.4km 지점, 출발한 지 3시간 30분이 지났습니다. 수월봉 육각정에 와 있습니다. 이 정자는 1940년 건축된 것으로 기우제를 지내던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정자 위에서는 제주 서부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고, 특히, 차귀도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탁 트인 느낌이 듭니다.


수월봉은 약 18,000년 전 뜨거운 마그마가 물을 만나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만든 고리모양의 화산체의 일부입니다. 수월봉에서 분출된 화산재는 기름진 토양이 되어 신석기 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어 주었습니다.


엉알길은 수월봉 해안의 산책길입니다. ‘엉알’은 ‘큰 바위, 낭떠러지 아래’라는 뜻으로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화산재 지층과 화산탄이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길을 형성했습니다. 이 길은 총 3.3km이고,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아래 사진)


2010년 아버지 돌아가신 후 어머니, 이모님을 모시고 와서 배 낚시하던 차귀도 앞 포구를 지나갑니다. 포구 앞에서는 여전히 오징어가 널려져 있네요.


당산봉을 향해 올라갑니다. 12코스 마지막 오름입니다.(14.9km) 10분간 급경사 계단을 오르면서 체력이 마지막까지 탈탈 털리네요. 예상대로 이 오름은 옛날 뱀을 신으로 모셨던 신당이 있었는데 이 신을 ‘사귀’라고 했습니다.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오름’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생이기정 바당길

제주어로 ‘생이’는 새, ‘기정’은 벼랑, ‘바당’은 바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생이기정 바당길’은 ‘새가 살고 있는 절벽 바닷길’을 의미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말과 풍경의 ‘생이기정 바당길’입니다.


14시 20분, 시작점 무릉에서 출발한 지 5시간 25분 만에 종점 용수에 도착했습니다. 12코스는 거리가 길고, 오름이 세 군데나 있어서 오르막 올라갈 때 발바닥이 불이 나는 것처럼 뜨거웠고,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걷는 내내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마을, 논과 밭, 비닐하우스를 세우는 사람들, 밭에 약을 치는 부부... 한결같이 사람 사는 모습과 그들의 생활을 보는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11코스가 망자(亡者)의 길이라면, 12코스는 살아있는 자의 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또 엉알길, 생이기정 바랑길 이런 곳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관광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경은 중문주상절리에 못지않게 아름다웠으며, 산책길은 바다, 섬, 바람을 천천히 느끼기에 좋았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눈을 아름답게 밝혀주는, 마음이 밝아지는 올레 12코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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