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올레길 (13코스)

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by 밤안개

가을이 오는 협재

꿈꾸다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창밖은 아직 어둡기만 합니다. 얼마 전까지 밝았던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옵니다. 가을입니다.

섬(島)에 들어와 맞이하는 이 낯선 손님을 어찌 대(對) 할지요? 바다는 매일같이 다른 모습의 빛과 공기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바다가 저런 색 이었을까?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갈 때면 바다는 청귤색의 빛깔로 우리를 맞이하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쿨 하게 인사합니다. "안녕, 산책 나왔니? 즐거운 시간 돼" 그러고는 돌아올 때면 이번에는 짙은 흑 청색에 흰색 석조(夕潮)를 내어 놓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간단다. 곧 어두워져. 조심해 들어가" 시간에 따라 다른 빛과 공기를 내는 바다를 보며, 바다가 내는 이 빛과 공기가 원래 이랬었는지 물어봅니다. "너희는 원래 이렇게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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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2일 월요일

이젠 '시원하기'보다는 '쌀쌀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합니다. 오늘 아침 협재는 싸늘한 느낌이 듭니다. 어느덧 올레 길도 중반을 훌쩍 넘어가고 있고, 집에서 올레 시작점까지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13코스 시작점 용수포구까지 버스로는 40분, 택시로 17분 정도 걸리네요. 큰맘 먹고 06시 20분 택시를 호출했는데, 호출받는 택시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버스를 기다립니다. 버스는 22분 후에야 도착이네요. 시골 살면서 이쯤은 넉넉히 웃으며 넘어갑니다. 쌀쌀한 협재의 9월입니다.


협재에서 출발한 202번 버스는 용수리 충혼묘지 앞에서 정차합니다. 여기서 13코스 시작점 용수포구까지는 1.2km를 걸어야 합니다. 도보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 지점에서 13코스를 시작합니다. 올레수첩에는 13코스 시작점의 스탬프를 미리 찍어 놓은 상태고, 이 스탬프 옆에 해당사항을 표기해 놓습니다.


이제부터 제주의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올레코스로 알려진 13코스를 시작합니다. 07시 15분, "꼬닥꼬닥, 이 길 위에 축복이 있기를"


한라산방면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해가 들고, 공기는 조금씩 따뜻해집니다. 구수한 시골냄새가 코를 자극하네요. 오감이 가을감촉을 살갑게 전하며, 몸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기분 좋은 시골길입니다.


1957년 용수저수지는 제방을 쌓아 인근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되었습니다. 이곳의 소나무 숲과 갈대, 부들 군락지는 겨울을 지내러 오는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나는 제주의 길들을 종류별로 맛보았습니다. 시원하고 숨이 탁 터지는 바랑길, 어둡고 습하다 금세 햇살로 눈이 부시는 숲길, 산 전체가 묘지였던 망자의 길, 큰 도로 작은 도로 등 나는 여러 제주의 길들을 걸어 나갔습니다. 어떨 때는 좋았지만, 어떨 때는 힘들기도 했고, 어떨 땐 온몸이 생동감에 떨리기도 했지만, 어떨 땐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문득 '여러 종류의 길 중 어떤 길에서 가장 에너지가 충만하고, 마음의 감동이 되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겨납니다. 오늘 13코스를 걸으며 그 답을 얻습니다. '사람 사는 길'입니다. '사람의 냄새, 사람의 흔적, 사람의 땀과 노력' 그 안에 행복과 평안이 있습니다. 아주 멋지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마냥 평범한 시골길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시골길 같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누구나 편히 와서, 쉬다, 걷다, 놀다, 갈 수 있는 포근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고목숲길

08시 30분, 출발한 지 1시간 15분이 지났습니다.(6.5km) 시골길을 쭉 올라오다가 고목숲길로 들어섭니다. 이 숲길은 크고 오래된 나무들 때문에 이렇게 불려졌습니다. 15분 정도 걷는 이 숲은 조용하고, 호젓했습니다. 가끔씩 오래된 나무냄새가 한약 향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숲을 나와 낙천의자공원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슬슬 더워지고, 땀이 나기 시작하네요. 가져온 곰보빵을 하나 먹습니다.


고사리숲길

09시 정각, 출발한 지 1시간 45분이 지났습니다.(7.7km) 고목숲길을 벗어난 지 15분 만에 고사리숲길로 들어섭니다. 제주 고사리는 산이나 들에 흔히 나는 식물로 봄에 새싹이 나면 채취해서 먹거나 말려서 보관합니다. 아내와 저는 평소 고사리를 먹지 않았으나 제주에 온 후부터는 즐겨 먹습니다. 제주 고사리는 식감이 억세지 않고, 씹기가 기름지고, 고소해서 먹으면서 건강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잠깐의 고사리숲길이 끝나고, 아치모양의 대나무숲길을 지나서 도로를 건너 시골길에 들어섭니다. 역시 사람흔적이 있어 정겨운 오솔길입니다.


09시 43분, 낙천리를 지나갑니다. 이 마을은 뭔가 특별해 보입니다. 설문대 할망의 전설, 마을중심에 멋지게 서 있는 고목, 그 속에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설문대할망이 섬 제주를 만드는 게 농사일처럼 힘들더니 오뉴월 땡볕에서 한경이라 낙천 지경을 만들다가 땀방울을 떨어뜨렸다. 그 떨어진 자리마다 조화가 일어나 아홉 연못이 되었다. (낙천리 담벼락에 실린 글)


저갈물(저거흘)

이 연못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빌레 웅덩이에 물이 고여 뭇 짐승들이 물을 먹기 위해 찾았으며 특히 멧돼지들에 의하여 연못이 넓어졌으므로 옛 선인들 에 의해 저거흘(猪居흘)이라 명명되었습니다.


제주 아홉굿 의자마을

1,000개의 이야기가 있는 의자마을은 설문대할망도 쉬어가는 마을 낙천리 아홉 굿(Nine Good) 의자마을을 말합니다. 마을 명 '아홉굿'은 '아홉 개의 샘이 있다'는 뜻과 '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홉 가지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밤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장수풍뎅이가 찾아드는 천혜의 청정함과 즐거움이 솟아나는 이곳은 100m 지하암반수로 키워낸 건강한 먹을거리와 다양한 체험거리가 있는 농촌 문화공간입니다. 제 생각은 이 마을에 올레꾼들이 오면 쉬어 가라는 뜻에서 '의자마을'이라는 닉네임과 조형물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재미있는 길을 지나갑니다. '뒷동산 아리랑 길'입니다. 이 길은 올레길이 생기고 새롭게 지어진 이름입니다. 길 중간중간 묘지들이 보입니다. ‘아리랑 길’이라 부르는 이유를 잠깐 생각해 봅니다. 순간 길이 슬퍼지고, 발걸음은 빨라집니다. 이제 13코스의 마지막 목적지 저지오름으로 올라갑니다.


저지오름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숲인 저지오름은 닥나무가 많아서 닥물오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저지는 닥나무의 한자식 표현입니다. 높이 390m, 둘레 1,540m로 제주올레 13코스 내 정상과 둘레길이 모두 걸쳐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저지오름 전망대를 올라가서 반대편 방향으로 내려오는 시간은 도보자의 걸음으로 대략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오름에 오르는 분들이 꽤 보입니다. 맨 발로 산길을 걷는 이도 있네요. 유난히 발목이 얇아 보이는 다리입니다. 건강의 축복이 오름에 오르는 모든 이들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시 30분, 13코스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다른 어느 때보다 일찍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이유는 협재 집에서 시작점까지의 거리가 짧아져서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길도 무난했습니다. 맨 마지막 3km 정도, 대략 30분 정도 소요되는 저지오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약간 오르막성의 평지였습니다. ‘오르막 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길이 한라산 방면으로 나 있어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처음 용수포구를 제외하고는 바다를 접하는 부분은 없었지만, 길을 걷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던 것은 대부분 시골길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밭일을 하는 분들, 포장된 마을길, 고즈넉한 숲, 비닐하우스와 산뜻한 주택들 대부분 사람 사는 터전이 잘 정비되고 깔끔했습니다. 걷는 내내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낙천리라는 동네는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설문대할망이 애써 땀 흘린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사람들의 땀과 노력에 의해 잘 정비된 마을로 보였습니다. 마을 앞 큰 고목나무는 신성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올레 13코스는 전체적으로 사람 향취가 풍기는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하는 구수한 숭늉과 같은 길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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