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올레길 (14-1코스)

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by 밤안개

집으로 가는 비행기


화장실 앞자리에 앉았다.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줄 서서 화장실 앞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불편하다.

누군가 저 안에서 싸고 있을 것이다.

저이도 들어가 쌀 것이다.

나는 자야 한다. 억지로 눈을 감는다.


화장실 앞자리에 앉았다.

분명 냄새는 나지 않지만 불편하다.

창 쪽에 앉아 나는 한 번도 일어서지 않았다.

한 시간마다 화장실 앞에 서있는 사람도 있다.

마려워서 오는 걸까?

다리가 아파 운동 삼아 오는 걸까?


화장실 앞자리에 앉았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것은 다리가 저려오기 때문이다.

감다 뜨다 하는 것은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해서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영화도 보기 싫어진다.


화장실 앞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한참을 자다 깨다 뻗다 굽혔다 하다가

생각해 본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어떤 마음이 들까?

지나간 것은 안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 뭔가 그립다.

옛날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나는 자꾸 그때를 생각한다. 그러다가

"레이디 앤 젠틀맨" 하면 나는 또 집에 갈 일을 걱정한다.

(2025. 9. 11. 밀라노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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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4일 수요일

상쾌한 수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택시를 타고 14코스, 14-1코스의 동일 시작점인 저지사무소로 향합니다. 새벽 2시에 깨서 잠을 좀 설쳤더니 머리가 무겁고, 눈이 침침합니다. 협재 바다가 도보자의 피곤을 아는지 넉넉히 안아주네요. 포근한 바다의 품속에서 다시 힘을 내봅니다.

“부엔까미노, 오늘도 이길 위에 축복이 있기를”


06시 50분, 14-1코스 시작점 저지예술정보화마을 앞에 와 있습니다. 원래 이 코스는 15km 이상 되는 코스였는데, 사유지를 경유하는 일부 길이 통행금지 되는 바람에 거리가 확 줄어들었다고 올레 여행자센터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덕분에 오늘 트래킹은 일찍 종료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24일)은 한림오일장 서는 날입니다. 올레 걷기가 끝나는 대로 씻고, 장 보러 갈 예정입니다. 점점 시골사람이 되어 가네요. 장 서는 날이 폰 캘린더에 알람으로 설정되어 있고, 장 보는 일이 중요한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흐린 날씨, 구수한 시골냄새가 나는 길옆으로 반갑게 책방이 있습니다. 서점의 이름은 <小里小文>입니다. 그 옆에는 미술카페 <쌤>도 있네요. 정겨운 느낌이 듭니다.

알못

‘알못’을 지나갑니다. ‘알못’은 알갱이가 많이 생긴다는 뜻으로 이 연못에는 작은 물고기, 개구리, 소라 등이 살고 있습니다. 이 느낌, 이 분위기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는 아침, 시골길에 실릴 수많은 서사들을 상상해 봅니다. 꿈속에라도 걷고 싶어지는 시골길입니다.

저지리&곶자왈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4호로 지정된 마을, 2007년 전국 가장 아름다운 숲 대상을 탄 마을 ‘저지리’입니다. ‘곶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을 일컫는 제주말입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곳으로 한 겨울에도 푸름을 자랑하는 숲입니다.


와! 해가 나 있는데 비가 옵니다. 08시 13분, 도보자는 지금 문도지오름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고목나무 밑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준비해 온 사과를 먹고 갑니다.


비는 맞을 만합니다. 백 팩에 비닐커버를 씌우고 비 오는 산길을 다시 걷습니다. 말 목장을 지나갑니다. 말은 늘 온순하네요. 그리고 끊임없이 먹네요.

14-1코스의 핵심은 지금 걷고 있는 문도지오름 일대일 것 같습니다. 길이 넓고, 탁 트여 있어서 가볍게 산책하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사유지 이슈로 폐지된 구간은 문도지오름 정상까지의 길인 것 같습니다.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른 후 도보자는 완만한 경사 길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숲이 이렇게 아름다워서 올레 여행자센터 직원분이 그런 아쉬운 이야기를 했나 봅니다. 사람을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한적한 이 산길을 저는 라디오의 'CBS 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을 들으면서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곳을 지나갑니다. 숲 속에 누군가 배를 만들어 전시해 놓았네요. 종류별로 다양한 배들이 숲에서 노 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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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덩굴이 뒤엉킨 곶자왈을 지나갑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숲입니다. 숲에서 노루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납니다. “아이고! 나도 놀래부난...”


1.5km 숲길을 걸어왔습니다. 이 숲은 제주 숲이 가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네요. 어둡고 습한 길에서 뱀을 만나기도 했고. 쭉쭉 뻗은 소나무와 비자림 사이에 햇빛이 들면 어두운 숲은 곧 밝아지기도 했고, 돌길을 조심히 걷다 보면, 얼굴에 거미줄이 엉키기도 했습니다. 노루가 나타나 도보자를 놀라게 하기도 했으며, 알 수 없는 짐승의 배설물이 코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걷기는 힘들었지만 숲은 사람 손때가 타지 않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내 도보자의 몸과 마음을 힐링케 해 준 치유의 길이였습니다.


09시 56분, 지금 서 있는 곳은 저지상수원입니다. 이 상수원은 제주에서 가장 큰 상수원으로 약 10만 평의 면적에 1,000여 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이제 최종 목적지 오설록녹차밭을 향해 갑니다.


10시 15분, 올레 애플리케이션에서 갑자기 "주변에 스탬프가 있습니다." 하고 음성메시지가 들려옵니다. "여기에?" 나도 모르게 툭 하고 말이 나오네요. 아직 숲길 한 가운데기 때문에 당황스럽습니다. 잠시 리본을 따라 20여 m을 이동합니다. 갑자기 환 해 지더니 넓은 밭이 나옵니다. 녹차 밭이네요. 오늘의 최종목적지 오설록녹차밭입니다.(10시 17분)


평소 걷던 거리의 2/3 정도 거리의 올레 14-1코스는 중간 산 지역 올레길이 가지고 있는 묘미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 손때가 묻지 않은 소나무, 비자림 숲길엔 아직 동물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했고, 인적이 전혀 없는 산길엔 적절히 햇빛과 공기가 도보자를 건강하게 하는 광선을 쏘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걸 피톤치드라고 했던가요? 아무래도 아쉬운 것은 문도지 오름을 오르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의 사유지인 것은 맞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을 맘껏 함께 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하튼 덕분에 도보자는 한림장이 서는 오후에 아내와 장 구경을 갈 수 있어서 마냥 좋기는 합니다. 좋은 날, 좋은 길 올레 14-1코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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