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올레길 (14코스)

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by 밤안개

노지귤


고생고생 하멍 상품성 읍는거 왜 할라카

내 눈에 흙 들어가문 안돼

내 죽을 먼 그때 니들 맘대로 해랑

천혜향, 황금향 멘질멘질

그거 얼만히 이쁘당, 다들 이런 걸 좋아한당

아, 글씨는 내 죽으먼 하라꼬마


또르르르, 또르르르

발밑에 떨어져 터져버린 귤 하나

형들은 고향을 떠나 서울 가고

나는 제주에 남아 밭에 삶을 묻었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하필 내 앞에 떨어진 볼품없는 귤 하나

누구는 대학 나와 서울 살고,

나는 왜 못나 이 땅에 내내 있는가?


어머니는 왜 여길 떠나지 못했을까?

매일같이 힘겨운 제주 사름살이

어머니가 남긴 땅 팔아 지은 하우스

또르르르 발아래 떨어져 터진

어머니 닮은 노지귤 하나

(2025.9.23)


2025년 9월 23일 화요일

오늘은 특별한 올레길이 될 것 같습니다. 올레 14코스는 우리 동네 협재를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랑 점심을 먹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는데, '이게 웬일인가요?' 혹시나 해서 택시를 콜 했는데 바로 잡히네요. 15분 만에 14코스 시작점 저지사무소에 도착했습니다. 07시 정각, 기분 좋게 길을 시작합니다. 오늘도 이 길 위에 축복이 있기를.


이 마을은 예술가 마을이었군요. 마을 곳곳에는 갤러리, 전시관, 카페 등 예술·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목 김흥수 화백이 자신의 작품들을 무상으로 기증한 제주현대미술관이 바로 여기에 있고,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도 인근에 있습니다. 꼭 시간을 내서 와 봐야겠습니다.


배추를 지키는 재미있는 형광 허수아비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이 허수아비는 야간에도 몸에 불을 켜고 밭을 지킬 태세입니다.

오시록헌 농로

‘오시록헌’은 '아늑하다'는 의미의 제주어입니다. 밭길을 걷는 느낌이 아늑해서 제주올레에서 '오시록헌 농로'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도보자를 힘들 게 하는 길은 돌길입니다. 오시록헌 농로를 따라 돌길을 걸으면서 다시 왼쪽 발바닥이 저려옵니다. 돌멩이가 바닥을 누르면서 통증이 찌릿하게 오네요. 일부러 왼쪽 발은 흙길을 골라 걷습니다. 걷는 내내 절뚝거립니다.


굴렁진 숲길

움푹 페인 지형을 제주어로 '굴렁 지다'라고 합니다. 이 길도 제주올레에서 새로 개척하고 ‘굴렁진 숲길’로 명명했습니다.


굴렁진 숲길 쉼터에서 아내가 싸준 간식을 먹고 갑니다. 한림오일장에서 산 사과 참 맛있네요. 멋진 휴식처 굴렁쉼터(도보자가 작명)에서 잠깐 쉬어 갑니다.


8.3km 지점, 저지에서 출발한 지 3시간을 걸어왔습니다. 숲길을 통과하여 바다 방향으로 향합니다. 표지판에 익숙한 동네이름이 나오네요. 금능리입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출발한 지 3시간 40분이 지났습니다.(9.8km)


월령리 마을

우리 동네 협재의 옆 동네 월령리마을 입구입니다. 한림읍 서쪽 끝에 위치한 이 마을은 울창한 나무숲과 독특한 색깔의 현무암 돌무더기들이 널려져 있고, 특히 선인장들이 자생하는 넓은 자생지 마을입니다. 선인장 열매는 '백년초'라고 해서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명천 진아영할머니 삶터

1949년 12월 진아영할머니는 경찰이 쏜 총에 턱을 맞고 살아남았지만 55년 동안 무명천을 두르고,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래서 무명천 할머니로 불려졌습니다. 할머니 삶은 4.3의 아픔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알려줍니다. 한강작가도 책에서 이 할머니를 언급했던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 삶터가 할머니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영원의 쉼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슬픈 역사입니다.


월령리 해변

도보자는 4시간 19분 만에 코발트 빛 월령바다에 와 있습니다. 이 지역은 월령리 선인장군락지이기도 합니다.

비양도(飛陽島)

해지는 섬 비양도(飛陽島)를 월령에서부터 계속 눈에 담고 왔습니다. 비양도(飛陽島)는 1,002년(고려 목종 5년)에 분출한 화산섬으로 제주 화산섬 중에는 가장 나이가 어립니다. 저희 집이 있는 협재 바다에 이웃하고 있는 섬(島)입니다.


해안을 낀 돌길을 20분 정도 걷습니다. 역시 발바닥 통증이 계속 오네요. 속도를 줄이고, 발 디디는 곳, 흙 디딜 곳을 찾아가며 걸어 나갑니다.


금능리

12시 15분, 도보자는 월령리를 지나 금능리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협재 바로 옆 마을입니다.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의 포구를 방금 지났습니다. 참 아름다운 마을, 사진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빛, 바람, 공기입니다.

협재리

드디어 우리 동네 협재리를 지나갑니다. 아내와 저, 강아지가 산책하는 길이 올레 코스 안에 들어왔습니다. 비양도(飛陽島)가 바로 코앞에 보입니다. 평생 내 안에 고향처럼 남게 될 바다입니다.


옹포리에서 한림항까지

길은 협재에서 옹포를 거쳐 한림항을 향해 갑니다. 한림항은 비양도를 갈 수 있는 배를 탈 수 있는 조그마한 항구입니다. 최종 목적지까지 2.2km 남았습니다.


13시 45분, 저지에서 7시에 출발했으니까 6시간 45분 걸려서 최종목적지 한림항에 도착했습니다. 여태 걸었던 코스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올레 14코스의 반은 저지예술정보화마을에서 출발해서 마을도로를 지나 숲길, 특히 농로사이 돌담길을 걷는 길이였습니다. 중간중간 돌길이 있어서 도보자에게는 무척 힘든 코스였습니다. 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운동화도 불편할 것 같은 이 길은 밑창이 두꺼운 트래킹화나 등산화를 신고 걸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나머지 반은 바다를 바라보는 해안 길로 되어 있어서 눈이 호강했습니다. 월령, 금능, 협재, 옹포, 한림항에 이르는 이 길은 바다를 계속 바라보면서 해안을 걷기도 했고, 해변의 모래를 밟으면서 행복해지기도 했습니다. 9월인데도 아직 바다수영을 하는 사람들, 물속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여전히 바다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며 언제가 나도 여기를 떠난다면 이 바다가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올레코스 안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한림항에서 배를 타고 비양도를 가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지난달 어른들을 모시고 비양도를 둘러보았는데 관광객들 모두 이 섬을 좋아했고, 섬 속에 있는 섬이라는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다들 이런 화제로 신이 나셔서 이야기하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비양교회를 들러 조그만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나오면서 목사님, 사모님과 나누던 이야기도 기억납니다. 아름다운 바다와 고즈넉한 숲길이 잘 조화된 제주 서부의 멋진 길 올레 14코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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