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올레길 (16코스)

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by 밤안개

秋夕前夜


뿌아앙~, 뿌아앙~

기차는 어디로 가려는가?

눈 비비며 대청마루에 서면

기차는 이미 쌍 다리를 지나

꼬리를 감추고, 어린 나는

석탄열차인지, 사람열차인지 궁금해진다.


뿌아앙~, 뿌아앙~

저 기차는 제천 가는가? 서울 가는가?

엄마는 곧 온다고 했는데

아버진 또 술 드시려나?

할머닌 부뚜막에 장작을 넣으며 투덜대고

할아버진 바튼 기침을 해대며 연실 담밸 피우신다.


삐그덕 거리며

양철대문이 쇳소리를 끌면

똥개 용이는 컹컹 짖어대고

술 취한 삼촌이 "엄마 저 왔어요" 한다.

한참을 지나 "삐끄덕, 컹컹" 거리면

서울서 온 엄마가 "어머니 저 왔어요" 하면

문틈으로 고개를 삐쭉 내민 동생은

눈만 뻐끔뻐끔 거리며 낯선 엄말 쳐다본다.


밤새 엄마는 부뚜막연기로 눈물을 흘리고

할머닌 투덜거리며 밀가루를 빚으면 우리는

참깨를, 콩을, 밤을 속에 넣으면서

"깨 넣은 건 내 거야" 하고 표시를 해 놓는다.


어느덧 땅거미 내려 용이 또 짖어대어

아버진가 싶어 내다보면

이웃집 할머니가 서울 며느리 보러 왔다 하고

어떤 아저씬 힐끗힐끗 담 너머 쳐다본다.


할머니가 밥상을 여러 번 들이고 내고 하다보면

삼촌들이 웃방에서 화투를 치다 목소리가 커지고

고모의 올케 흉에 엄마가 훌쩍 훌쩍대면

어느덧 깊어지는 밤,

나는 아버질 기다리다 잠이 든다.

(2025. 10. 10)



2025년 9월 29일 월요일

가을입니다. 협재는 공기와 빛으로 가을을 말해 줍니다. 사뭇 새벽공기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빛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은 더욱 높고, 구름은 그 안에 붉은빛을 품은 채 바다와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둘은 다른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바다는 멀리 하늘과 같은 색을 띱니다. 하늘과 바다가 같다는 착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또다시 올레 길을 시작합니다. 7시 12분, 버스는 시작점 고내포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시작점을 찾는데 난항을 겪었습니다. '16코스 올레여행자센터'로 검색했어야 했는데 '고내포구'로 목적지를 검색하고 왔더니 시작점을 넘어왔네요. 고내리 애월 119 센터에서 하차해서 1.2km 뒤로 이동해서 현재 16코스 올레여행자 센터 앞에 와 있습니다.


08시 정각, 올레 16코스를 걷기 시작합니다. “부엔까미노, 이 길 위에 축복이 있기를”

출발한 지 5분도 안되어 멋진 쉼터를 맞습니다. 다락쉼터입니다. '항몽멸호(抗夢滅胡)의 땅'이라는 비석이 마음에 닿습니다. 다락쉼터에는 최영장군과 김통정장군의 석상이 있으며, 이곳은 몽골잔재를 척결하기 위해 일어난 삼별초와 목호의 난을 기리기 위한 장소입니다.


08시 28분, 신엄포구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고내리에서 신엄포구까지 해안도로는 참 아름답습니다. 바다를 멍하게 바라보거나, 뛰거나, 산책하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누구라도 걷고 싶은 바당길입니다.

신엄포구를 지나서 신엄해안을 맞닥트려집니다. 길은 왼쪽으로 바다, 오른쪽에는 도로입니다. 아름다운 바다가 눈앞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길은 해안절벽을 끼고 이어져 있습니다. 파도, 바위, 풀, 하늘, 구름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입니다.


구엄돌염전

이 돌 염전은 현무암 위 천연 암반지대에서 소금을 생산하던 곳으로 1950년대 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이곳은 넓고 평평한 현무암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과거에는 찰흙으로 테두리를 만들어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던 현장입니다. '한국의 우유니'라고 불리는 이곳에 중국 분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잠깐 길을 잃었습니다. 구엄 어촌체험마을을 지나 길은 해안 길을 뒤로하고, 한라산 방면으로 틀어 가야 합니다. 16코스를 걷는 분들께서는 주의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도보자는 50m 직진 후 음성메시지를 듣고 되돌아왔습니다. 다리를 아껴야 할 텐데, 여하튼 길은 북쪽 마을 안으로 들어섭니다.

마을을 지나며 아내가 싸준 한림장표 사과와 떡으로 허기를 달랩니다. 꿀맛이네요. 10시 6분, 5.8km 지점입니다.


수산봉

도보자는 내륙으로 들어와서 이제 수산봉으로 올라갑니다. 야트막한 이 산에는 시비(詩碑)가 숨어 있었네요. 詩처럼 깊이가 느껴지는 적막감이 산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산을 오르내리는데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숲 안으로 소나무가 짙은 향을 내는 이 오름 정상엔 조그만 연못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연못을 지녔다고 '물메오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파크골프를 즐기고 계신 분들이 마냥 좋아 보이네요. 저기 수산저수지도 보입니다.


김통정

김통정이란 인물을 언급하지 않고 16코스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려 원종시기 삼별초의 장군으로 몽골과 고려 정부에 항거하다가 진도에서 진압된 후 제주도로 달아나 계속해서 몽골에 저항했습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삼별초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항파두리성(缸波頭理城)을 거점으로 삼아 몽골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 여몽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사망했습니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缸波頭理 伉冡遺蹟地)

이곳은 고려시대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이 있던 곳입니다. 국가사적 39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상상을 해봅니다.

고려시대 삼별초 군대가 제가 보고 있는 이 토성을 쌓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이 섬에 와서 결사항쟁을 했던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원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갖은 고문가운데 풀려났던 군인들, 나라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던 식자층들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 이들이 여기 저 높이의 토성을 쌓아 몽골족과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이 나라는 그렇게 지켜져 왔던 것입니다.


메밀꽃밭을 지나 청화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 광령리를 향해 걸어갑니다.


13시 05분, 16코스종점, 광령1리 사무소에 도착했습니다.

고내리에서 8시 정각에 시작해서 여기 종점까지 총 5시간 5분이 걸렸습니다.

올레 16코스는 숨은 진주 같은 코스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곽지 잠녀의 길' 못지않은 기암절벽의 해안길이 전체코스의 반 정도 펼쳐져 있습니다. 특히 올레리본을 꽂아놓은 해안 절벽 길은 도보자의 가슴을 뻥 뚫게 해주는 시원함을 선사해 주었고, 구엄돌염전이 있는 곳은 충분히 관광객들에게 낯선 즐거움을 줍니다. 내륙으로 들어서는 역시 고려말기 항몽 항쟁 유적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缸波頭理 伉冡遺蹟地)에서 본 토성(土城)은 당시 바다를 건너 마지막까지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삼별초와 신의군의 활약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생각해 보면 이 나라가 어떻게 지켜지고, 만들어져 내려왔는지, 또 우리는 현재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따져보면 참 반성 할 것이 많아집니다. 작지만 많은 시비(詩碑)를 담고 있는 수산봉에 있던 최문자시인의 시가 자꾸 마음에 남습니다. 위 시비에 있는 詩 몇 구절을 올려봅니다. 올레 16코스는 숨겨진 진주와 같았습니다. 진주 같은 아름답고, 단단한 결의가 느껴지는 멋진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길이였습니다.


나무는 죽고 싶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꾹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최문자시인의 詩 <닿고 싶은 곳> 中


이전 19화다시, 제주 올레길 (15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