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서로 반쪽
아내는 느리고 나는 급하다.
아내는 따뜻하고 나는 덥다.
아내는 춥고 나는 시원하다.
너무나 다른 우리는 서로의 반쪽이다.
나는 여덟 시에 자고,
아내가 자는 새벽 한 시에 깬다.
나는 그 시간에 책을 보고
아내는 내가 자는 시간에
공부를 했을 것이다.
너무나 다른 우리는 서로의 반쪽이다.
아내와 나 사이에는
이 미터의 간격이 있다.
나는 빨리 걷고, 아내는
느리게 걷기 때문이다.
한참을 가다 나는 멈춰서
아내에게 말한다.
"쫌 빨리 와."
그럼 아내가 말한다.
"쫌 같이 가면 안 돼."
그래도 나는 안다.
내 안에 서로 다른 나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떨어질 수 없는
반쪽이라는 것을...
(2025.11.12.)
2025년 10월 1일 수요일
올레 시작점으로 가는 이동시간이 다시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도보자는 협재에서 정반대 방향인 동쪽 끝 성산 시흥에서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중문, 모슬포, 고산, 애월을 돌아서 어제는 북쪽 제주시로 입성했습니다. 이제 나머지 퍼즐은 다시 동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느덧 이 길도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다만, 아직 마지막 이벤트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추자도'입니다. 추자도는 18-1, 18-2의 상·하 추자도 2개 코스로 되어 있는데, 듣기로는 추자도 걷기가 다른 어떤 코스보다도 멋지고, 경이롭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올레 길은 어느 곳에서나 많은 서사와 자연풍경, 문화적 향취를 품고 있습니다. 모든 길에서 우리는 잊고 살았던 삶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걸어야만 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자아'입니다. 온몸의 고통과 통증 속에서 말없이 걷다 보면, 저 밑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내가 보여질 것입니다. 속사람이 내게 속마음을 고백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06시 30분, 도보자는 18코스 시작점 김만덕기념관을 향해 달려갑니다. 내면의 깊이를 가진 협재 바다는 오늘도 도보자에게 묵언의 표정으로 인사합니다.
“잘 다녀오게 친구, 신이 네 길을 인도해 주시는 데로 묵묵히 가게나”
08시 15분, 김만덕기념관 앞에서 올레 18코스를 시작합니다. 도보자는 동쪽으로 갑니다. 18코스 시작점에서 올레 꾼 한 분을 만나 사라봉까지 오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젊은 올레 꾼은 어제 제주에 들어와서 오늘 처음 18 코스를 걷는다고 하네요. 공항에서 제일 가까운 이 코스를 시작으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날이 저물면 숙박하고, 다음날 다시 이동하는 걷기를 택했습니다. 제가 5년 전 올레 길을 걸었던 방법입니다. 한 달 안에 모든 코스를 완주하고자 하는 새내기 올레 꾼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도보자는 다시 홀로 길 앞에 섭니다.
사라봉 망양정(望洋亭)
시가지에서 2km 떨어진 해안에 자리하고 있는 사라봉의 사봉낙조는 성산일출과 함께 영주십경 중 하나입니다.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서 약진하는 제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펼쳐진 검푸른 바다와 수평선은 매우 아름다우며, 비록 148m 불과한 봉우리지만 한번 올라가 낙조를 응시해 보면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황홀한 절경과 바다로 떨어지는 태양의 신비로운 장관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별도봉 산책길
원추형 봉우리를 끼고 둘레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은 별도봉을 따라 약 1.8km 절벽을 따라 산책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바다와 산이 함께 있는 아름답고, 경이로운 둘레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길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화북동 방면으로 걸어갑니다.
곤을동마을
곤을동마을은 제주시 화북1동에 위치한 역사적인 장소로 제주 4.3 사건 당시 초토화 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 마을은 화북천이 바다로 흐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곤을, 가운데곤을, 밧곤을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을을 지나며, 아내가 준비해 준 맛있는 사과를 먹습니다. 옆에는 수석을 전시해 놓은 카페가 이색적으로 보여 사진을 남깁니다. 라디오에서는 가곡이 흐릅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별도연대
해상에서 접근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고, 신호를 보내던 중요한 통신수단인 화북동 동쪽의 연대동산에 와있습니다. '연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정치적, 군사적 소식을 전하던 시설로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에 설치되었습니다.
파도가 세다고 알려진 삼양해수욕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맞닥트려진 작은 포구는 벌랑포구입니다. 조용하고, 평화롭습니다. 또 하나의 에너지바를 뽑아 들었습니다. 시루떡입니다.
삼양 검은 모래해변
협재에 살지 않았다면 거(居)했을 곳이 삼양입니다. 파도가 높아 서퍼들이 좋아한다는 이 해변은 고요합니다. 모래부터 확인했습니다. 검은색이 맞네요. 시원한 파도와 코발트 빛 바다, 검은 모래, 삼양을 사랑하는 이들은 詩를 지어 이 바다를 그리워했군요. 어느 사내가 정자 밑에서 기타를 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하모니카를 붑니다. '섬 집 아이' 네요. 바닷소리가 음악선율에 맞춰 파도를 탑니다. 詩가 쓰고 싶어 집니다.
신촌 가는 옛길
재미있는 길을 만납니다. '신촌 가는 옛길'입니다. 이 길은 삼양사는 사람들이 신촌마을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제사 밥을 먹기 위해 오가던 길입니다. 제주서는 집안 제사에 직계가족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제겐 어른들이 제삿날엔 평소 못 먹던 음식들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아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12시 07분, 도보자는 해안 길을 끼고 걷고 있습니다. 바다 저편에 정자가 하나 보이네요. 성산에 있는 섭지코지 보다는 작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경관이 있어서 붙여진 절벽이 바로 눈에 보이는 세비코지입니다. 작고, 아담해서 더 운치 있어 보이네요.
닭모루(닭머르)
닭의 머리처럼 독특하게 새긴 바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바닷가에 툭 튀어나온 바위 모습이 닭이 흙을 걷어내고 들어앉아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불리어진 이름입니다.
정자 위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냉장고 바람이 불어오네요. 인생의 모든 시름이 한순간 다 씻겨 내려 가는듯한 바람과 파도와 바다입니다. 모두 여기서 쉼을 얻습니다. 만인이 쉴 수 있는 곳 세비코지입니다.
12시 40분, 14km. 오늘의 마지막 마을 조천으로 들어섰습니다. 길은 구불거리며 마을을 끼고 돌아갑니다.
대섬
신촌리에서 조천을 따라가다 보면 특이한 고립 지를 만나게 됩니다. 대섬입니다. 이곳은 철새들의 중요한 도래지이자, 다양한 염생식물들이 자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양재단에 의해 매립과 평탄화 작업을 한 이후 더 이상 철새들이 찾지 않은 이곳은 버려진 늪의 느낌이 드네요. 개발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주는 외딴섬 대섬입니다.
엉물 남탕·여탕 / 엉물 빨래터
땅 속에서 솟아나는 물로 조천리 사람들은 식수로 사용하거나 채소를 씻거나 빨래, 목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섬에서도 쓰일 수 있는 물은 제한적 일수 밖에 없습니다.
연북정(戀北亭)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정자에 도착했습니다. 연북정(戀北亭), 제주에 유배 온 선비들이 한양에서 올 기쁜 소식을 기대하며 북쪽에 계신 임금님에 대한 충정을 담은 정자라고 하네요.
14시 정각, 최종목적지 조천여행자센터에 도착했습니다. 김만덕기념관에서 08시 15분에 출발했으니까. 총 5시간 45분 걸렸습니다. 올레 18코스의 묘미는 사라봉을 오른 후 펼쳐진 별도봉 산책길과 삼양 검은 모래 해변, 닭모루가 있는 세비코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다와 산이 만들어낸 절묘한 산책길에서 세상 시름쯤은 툭툭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요한 검은 모래해변에 들어서면 누구나 詩人이 될 것만 같습니다.
정인수詩人은 '사랑을 처음 고백하는 날 밤이면, 삼양해안도로로 오라'라고 했습니다. '둘이 서 있기만 해도 멀리 집어등들이 알아서 에워싸준다'라고 노래합니다. 사랑이 무르익어지면 나도 삼양에 가봐야겠습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기암절벽에 멋진 이름을 지어내는 것도 특별한 감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알을 품은 닭, 닭의 목과 머리, 날개 죽지 각각의 퍼즐을 맞추다 보면 '닭머르, 닭모루'란 말이 ‘참 맞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올레 18코스는 화려하거나 복작대는 유명 관광지는 없었으나 제주에 살면서 제주를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거나, 정(情)적인 안정을 필요로 하는 분들께 심리적 치유가 되는 그런 곳으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시골 고향 같은 포근한 올레 18코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