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by 밤안개

전쟁을 심하게 겪은 사내가 있었습니다

엄마를 잃고, 낯선 아버지를 뒤늦게 만나

네 아빠야, 네 아버지란다 하고

할머니 말을 듣고 그제야 고아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긴 일곱 살짜리 애가 있었습니다

지독한 할머니 덕에 그나마 목숨은 남아

아이는 일곱 살에 전쟁을 견뎌 냈습니다

엄마 없는 아이는 가난한 집 가장

이복동생 다섯을 부양하는 것이

장남의 역할이라고 여기던 사내

심한 가난을 겪어야만 했던 그의 인생


아들만 셋을 둔 그는 술꾼

취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했던 인생

두세 갑 담배 피워가며 견뎌낸 인생

힘줄이 팔, 다리 온통 불끈불끈

새벽에 들어와 새벽에 출근해도

그는 평생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너무 일찍 쓰러졌습니다

팔, 다리가 재산인 그는 재산의 반을 잃었습니다

다리를 절단한 사람, 똥칠하면 목 졸라 죽겠다던 사람

그는 다리를 절단하고 이틀도 안 돼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신만의 사는 방식으로 죽음도 그렇게 선택했습니다


그의 무덤에는 다리 대신 천조각이 둘둘 말려 있습니다

학창 시절 축구공을 그리 잘 차던 다리

산으로 들로 사방팔방 도토리 따던 다리

뙤약볕 중동의 사막을 누비던 다리

낙타 같은 힘줄이 불끈불끈거렸던 다리


나는 언젠가 그가 세상을 온통

바다처럼 만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해 콧줄을 끊고

병실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든 그가

언젠가 세상을 온통 코발트빛으로 칠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 죽으면 시원하게 바다에 뿌려 달라고

술만 먹으면 말하던 시원한 청귤색으로

세상을 시원하게 칠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두 팔로, 눈만 뜨면 하던 붓칠을

세상이 온통 시원하게 될 때까지

그는 밤새 칠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평생을 페인트칠했던 그는 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2025. 8. 26. 새벽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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