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둔한 3년 차 직장인의 비애

아 퇴사해야겠다

by 몰드브 회사원

창 밖 세상이 너무 따뜻해 보인다. 나는 2시간 오후 반차를 쓰고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있다. 퇴사를 할까 아님 재택을 한다고 할까 씨름하다 대표에게 실망감만 가득 얻은 채로. 남자친구에게는 너무 엿같아서 연차를 쓴다고 말했다. 예쁜 장소가 아니면 내 기분이 도통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네이버 검색으로 저녁에 가는 미술학원 근처 예쁜 카페에 안착했다.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1층의 카페, 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별 볼 일 없는 맞은편 가게 풍경들이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맞은편 가게와 내가 위치한 가게 사이로 지나가는 자동차들 중앙 가드에 '무단횡단 위험해요'라고 쓰여있다. 그 단어가 너무 선명하고 다정해서 세상이 마치 나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통유리창을 사이에 둔 바깥세상과 나는 묘하게 이질적이다. 통유리창 너머의 풍경이 다른 세상을 비추는 영화 스크린 같다. 나는 실망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고작 이 따위 일로 이럴일이냐?"는 한탄도 같이 새어 나왔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나는 대표에게 재직 3년 내내 줄곧 미뤄왔던 퇴사 의사를 밝혔다. 대표는 나에게 그러지 말고 쉬고 싶으면 재택근무를 하라고 권유했다.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회의실에서 나왔는데 생각해보니 재택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다음 날인 오늘 재택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표 왈. 그러면 계산하기 쉽게 6월이 시작되는 해부터 시작해.


계산이 쉽다니?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그 자리에선 말을 못 하고 나와서 곰곰이 생각했다. 내 급여를 깎겠다는 건가 싶어 다시 여쭤보았더니 급여를 깎는 것이 맞다고 했다. 내가 재택을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먼저 권유한 것 아닌가? 퇴직 의사를 밝힌 그날 면담 때는 급여의 급자도 꺼낸 적 없으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급여 삭감이라니. 게다가 급여가 삭감되면 내 퇴직금도 삭감된다. 월마다 삭감된 급여와 퇴직금 삭감액을 계산하면 나는 마지막 달에 반값을 받고 일하는 셈이다.


기민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계산하는 능력은 대표에게 배울 점이라고 생각했다. 이슈를 접하는 나에게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일러주고 그 계산에 근거해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방법도 종종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런 계산 능력들은 내 마음에 종종 스크래치를 냈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대표에게는 내가 재택 하는 것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마지막 근무 날들의 급여를 깎아 회사에서 금전적인 이득도 취하고 퇴직금도 삭감하고 유연한 근무제도로 내 마음을 충족시킬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본연의 업무는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진행될 테니 아무렴 상관없었다.


하지만 대표는 내가 대표에게 가지는 친밀감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고 나는 대표에게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표에게 내가 회사에 기여한 일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내가 회사를 위해 애쓴 노고들을 알아주기를 바랐고 단지 회사를 이루는 하나의 기계 부품처럼 취급받지는 않기를 바랐다. 나는 대표가 자본주의 손익계산을 적용시키지 않아도 되는 아끼는 부하직원이고 싶었던 것이다. 일이 힘들어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나에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재택근무를 제안하는 것이면 족했다. 하지만 급여 삭감으로 인해 나는 계산적으로 이용하여야 할 대상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를 부품 취급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무단횡단의 위험을 알리는 현수막처럼 사전에 어떤 일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예고해줬으면 좋겠다.'근로자는 사장한텐 비용, 재택은 비용절감'. 충격을 완화할 위로의 말도 덧붙여 남겨줬음 싶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다정하게 현수막으로 써 붙여주면 내 마음의 충격도 곧 회복의 태세를 갖출 수도 있지 않을까.


예고 뒤에 붙은 '그래도 괜찮아요'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판타지 영화에서 4차원 캐릭터가 하는 맥락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대사 같다. 하지만 내가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실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사실은 다 괜찮다고 누가 내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내 맘 속의 실망감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괜찮은 것도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대표는 대표의 역할을 한 것뿐이고 나는 나대로 나의 순진함을 안 것뿐이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화창하고 쨍쨍한 날 이렇게나 실망스러울 수 있다니! 며칠간 책을 읽고 카페에 앉아 또 열심히 책을 읽었는데 전체 페이지 473페이지에 아직도 236페이지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진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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