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의 변명 대한 피해자의 응답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작품이 있습니다. 이란의 거장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신작 '그저 사고였을 뿐'입니다. 파나히 감독은 오랜 시간 이란 사회의 억압과 인권 문제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 온 연출가로, 이번 작품 역시 이란 정부의 엄격한 검열과 금지령 속에서 몰래 촬영을 감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트라우마와 시스템의 폭력을 밀도 있게 다뤄낸 이 작품은 감독의 뚝심과 예술혼이 집약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이 영화는 최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화제작 '어쩔수가없다'와 흥미로운 대척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영화는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서 묘하게 맞닿아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걷습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영화의 줄거리와 함께, 두 작품이 보여주는 태도의 차이를 중심으로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오프닝 시퀀스
영화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자동차와 갑작스러운 사고로 시작됩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개 한 마리가 로드킬을 당하는 순간, 운전대를 잡았던 가장 에크발은 차에서 내려 상황을 확인하고는 무미건조하게 "그저 사고였을 뿐이야"라고 내뱉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 "역시 이건 다 신의 뜻이야"라며 남편의 말에 동조합니다. 이는 자신들의 잘못을 우연이나 운명, 혹은 사고라는 단어 뒤에 숨겨 포장하려는 어른들의 전형적인 회피 기제입니다.
하지만 뒷좌석에 타고 있던 어린 딸의 반응은 다릅니다. 아이는 "아니야, 아빠가 죽인 거야"라고 단호하게 반박합니다. 이 강렬한 오프닝은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가해자들은 폭력적인 시스템 뒤에 숨어 자신을 방어하지만, 순수한 아이의 눈이나 피해자의 시선에서는 그저 명백한 폭력일 뿐이라는 사실을 감독은 시작부터 관객에게 각인시킵니다.
에크발 가족은 차량 고장으로 외딴 사막의 낡은 정비소에 들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정비공 바히드를 만납니다. 바히드는 과거 국가폭력에 의해 감옥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입니다. 당시 눈이 가려진 채 고문을 당했기에 가해자의 얼굴은 알지 못하지만, 그의 감각 깊은 곳에는 지울 수 없는 공포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고문관이 다가올 때마다 들리던 의족의 삐걱거리는 마찰음입니다.
운명의 장난처럼 에크발의 다리에서 그 끔찍한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바히드는 혼란에 빠집니다.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결국 에크발을 납치하고, 과거 자신과 함께 고통받았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사막 한가운데서 그들만의 법정을 엽니다.
과연 에크발은 그 고문관이 맞을까요?
그리고 바히드는 복수를 통해 과거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두 개의 변명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떠오릅니다. 두 영화의 제목은 모두 가해자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변명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결이 다릅니다. '어쩔수가없다'에서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만수는 25년 경력 끝에 실직한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내 생계가 걸려있는데 어쩔 수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욕망을 생존 본능으로 포장하는 적극적인 자기 방어 논리입니다.
반면 '그저 사고였을 뿐'의 에크발은 "나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업무상 발생한 일이었다"라며 책임을 시스템과 신의 뜻으로 돌립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 주체성을 지우고 거대한 구조 뒤로 숨어버리는 비겁한 책임 회피입니다. 두 영화 모두 "당신의 폭력이 정말 불가항력적이었나"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그 대답을 찾아가는 주인공들의 선택은 판이합니다.
피해자의 윤리적 선택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는 살인을 거듭할수록 시스템의 약육강식 논리를 내면화하며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저 사고였을 뿐'의 바히드는 끊임없이 고뇌합니다. 그는 에크발을 납치한 뒤에도 '혹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닐까', '그와 똑같은 괴물이 되어도 좋은가'라고 자문합니다. 그는 심판의 권한을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와 나누려 하며,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양심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복수의 칼자루를 쥐고도 찌르지 않는 것, 그것은 용서라기보다 스스로 악마가 되지 않겠다는 숭고한 선언에 가깝습니다.
영화 후반부, 롱테이크로 촬영된 취조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입니다. 카메라는 편집 없이 긴 호흡으로 인물들을 비추며 관객을 배심원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에크발은 끝까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억울해하는데, 끊기지 않는 롱테이크는 편집하고 싶은 가해자의 기억과 달리, 매일같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합니다.
결말부의 사운드 연출 또한 탁월합니다. 바히드는 결국 에크발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냅니다. 이후 일상으로 돌아온 바히드의 뒤로 들려오던 삐걱거리는 의족 소리는 서서히 잦아들고, 그 빈자리를 새들의 지저귐이 채웁니다. '어쩔수가없다'의 엔딩이 공장의 기계음 속에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만수의 공허함을 강조했다면, 이 영화는 자연의 소리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은 바히드의 내면을 청각적으로 묘사합니다. 바히드가 에크발을 살려 보낸 건 그를 용서해서가 아니라, 복수의 사슬을 끊고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과거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는 법
영화는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가해자의 변명에 대해, "나는 당신과 다르게 선택했다"라는 피해자의 위대한 응답을 들려줍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새소리를 통해 진정한 승리는 복수가 아니라 인간다움을 끝까지 잃지 않는 것에 있다고 역설합니다. 비록 에크발은 여전히 자신의 죄를 "신의 뜻"이라 믿으며 살아가겠지만, 바히드는 비로소 과거라는 감옥에서 출소하게 된 것입니다.
이란의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집니다. 과거 독재 시절의 고문 피해자들,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권력의 남용 속에서 가해자들은 여전히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 변명합니다. 영화는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결말이 주는 여운은 깊었습니다. 악의 평범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바히드의 선택을 어떻게 보셨나요? 에크발 같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지, 아니면 복수가 마땅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