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가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도록, 현재를 살아가는 힘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신작, <세계의 주인>을 감상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쿠키 영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는데요, 그만큼 영화가 남기는 여운이 엄청난 작품이었습니다.
고민 없이 2025년 첫 별 다섯 개를 주었고요, 올해의 한국영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를 외친 소녀
스포일러가 없는 선에서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인공은 18살 여고생 '이주인'입니다. 이주인 역을 맡은 서수빈 배우는 놀랍게도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인데요,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경이로운 연기력"이라는 극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 그런 극찬을 받았는지는 영화를 보시면 바로 이해가 되실 겁니다.
흔히 말하는 생활연기가 정말 굉장합니다. 신인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윤가은 감독은 어디서 저런 괴물 신인을 발굴한 건지, 감독의 캐스팅 안목도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다시 줄거리 소개로 돌아와서, 주인이는 평범한 여고생입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싸'입니다. 친구들과 연애 이야기도 하고, 성에 대한 농담도 스스럼없이 하는 그런 열여덟 살 소녀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전교생이 참여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지는데 전교생이 다 서명하는데, 주인이만 홀로 거부를 하게 됩니다.
이 서명 운동이 어떤 서명 운동인지, 모두가 서명하는데 왜 주인이만 홀로 거부하는지, 그 일로 인해 주인이를 바라보는 주변 시선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감독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이 따라갑니다. 주인이는 과연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영화, <세계의 주인>입니다.
이제는 스포일러를 포함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혹시 아직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은
이후 리뷰 내용은 영화를 감상한 후에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이주인'과 '세계의 주인'에 담긴 의미
먼저 주인공 이름과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정말 기가 막히게 설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 이름인 '이주인'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우리가 흔히 쓰는 '주인(Owner)'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이주인(移住人)', 즉 이주하다 할 때의 그 이주입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밝은 곳으로 이주해온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영화 제목인 '세계의 주인'으로 이어집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World of Love", 즉 '사랑의 세계'입니다.
감독님 인터뷰를 보니까, 주인공 '주인'이가 낭만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고통의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 세계를 직시하고 자신의 삶의 진짜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다음은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텐데요, 감독님의 장편 영화 세 편을 보면 하나의 연결고리가 보입니다.
2016년작 <우리들>의 영어 제목이 'The World of Us'입니다. '우리'의 세계, 즉 친구들과의 관계를 다뤘고요. 2019년작 <우리집>은 'The House of Us'입니다. '우리'의 집, 가족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였죠. 그리고 이번 신작 <세계의 주인>의 영어 제목이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The World of Love', 사랑의 세계입니다.
윤가은 감독은 세 편의 작품을 통해 'Us'에서 시작해서 'Love'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 겁니다. 관계와 공동체에서 출발해서, 그 모든 세계를 지탱하고 회복시키는 힘이 결국 '사랑'에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삼부작을 완성시킨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라우마를 그리는 새로운 방식
이 영화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낀 지점은 성폭력 피해자의 '현재'와 '지금'을 그린다는 점입니다.
윤가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세계의 주인>은 '사건'이 아니라 '삶'을 살기로 결심한, 평범하지만 특별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만드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셨더라고요.
보통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잖아요?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세계의 주인>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주인이의 '지금'을 보여줘요. 남자친구랑 연애도 하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고, 남동생이랑 티격태격하고, 태권도 연습하고, 봉사활동도 하는 평범한 일상을 차분히 담아냅니다.
10대 후반 소녀가 겪는 첫사랑의 설렘과 고민, 진로 걱정, 가족과의 다툼, 친구들과의 우정. 이런 것들을 차곡차곡 보여주면서 주인이의 세계를 먼저 펼쳐놓습니다.
이 지점에서 트라우마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완전히 규정짓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윤가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보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영화 속 주인이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둡고 위축된 모습이 아니라 활기차고, 사랑 이야기에 관심도 많고, 심지어 성에 대한 농담도 친구들이랑 스스럼없이 나누거든요.
우리 안의 폭력적인 시선
영화의 핵심 갈등은 주인이가 거부한 서명서의 특정 문구에 있습니다.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이 문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말 같잖아요? 그런데 동시에 무슨 말이냐면, 피해자의 인생은 이미 망가졌고, 그 상처는 절대 회복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어버리는 거예요.
주인이는 이 말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영혼은 파괴되지 않았고, 상처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지금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증명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주인이한테 계속 배달되는 익명의 쪽지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넌 그런 일을 당했으면서 왜 그렇게 밝게 웃니?", "왜 남자친구를 사귀니?", "넌 왜 피해자답게 행동하지 않니?"
이게 바로 우리 사회가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인거죠. 그리고 이것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라는 겁니다.
감독님이 인터뷰에서 이 쪽지는 "주인이 같은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 또는 동시에 주인이의 자문자답일 수도 있다"고 하셨더라고요.
영화에서는 이 쪽지의 발신자를 끝까지 밝히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 쪽지는 특정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 아이들, 그리고 어쩌면 관객을 포함하는 우리 모두의 시선일 수 있거든요.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이 쪽지의 내용을 특정인이 아니라 반 아이들 전체의 목소리로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주인을 향했던 시선의 폭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 순간 그게 어쩌면 우리의 목소리이기도 했다는 걸 관객은 깨닫게 됩니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주인이의 친구들이 뒷담화하는 장면에서 제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지더라고요. "괜찮냐"고 묻는 무해한 걱정조차도, 때로는 당사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증명하라는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걸 섬세하게 포착해내더라고요.
영화의 상징과 디테일
이 영화는 디테일이 정말 촘촘하게 짜여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먼저 많이 회자되고 있는 세차장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거센 물줄기가 차를 때리고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그 공간 안에서, 주인이가 처음으로 거칠게 감정을 토해내잖아요. 차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듯이,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을 씻어내고 다시 마주보는 과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차 코스에 따른 소음의 크기와 감정의 크기가 맞춰져서 오르내리는데요, 저는 영화를 보면서 '와 연출 미쳤다, 저걸 어떻게 계산해서 한 거지?' 라는 감탄이 들었는데 나중에 감독 인터뷰를 보니까 촬영 때부터 의도한 건 아니고 촬영 후 후반작업하다 보니까 그 타이밍이 맞다는 게 보여서 살린 거라고 하더라고요. 잘되려면 이렇게도 잘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남동생 해인이의 마술쇼도 기억에 남는데요, 해인이가 계속 가족들한테 마술쇼 보러 오라고 하잖아요? 처음에는 그냥 자기 실력 뽐내면서 '나 마술 잘하지?' 뽐내고 싶어서, 관심이 필요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마술쇼 무대를 보는 순간 '아, 결국 해인이는 가족들에게 근심을 없애는 마술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결국 근심 쪽지를 없애는 마술은 트릭이 들통납니다. 이걸 통해서 사람들의 근심이나 상처는 마술처럼 한순간에 짠 하고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해인이의 순수한 마음과 현실의 간극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더라고요.
또 태권도장에 그을린 기둥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이 영화의 깜짝 캐스팅인 고민시 배우가 연기하는 미도가 불을 내서 그을린 기둥이 있는데, 관장님은 이걸 새로 페인트칠 하지 않고 그냥 둡니다. 미도가 스스로 지워야 할 몫을 남겨두는 것으로 보이더라고요.
감독은 인터뷰에서 "관장님을 통해 좋은 어른을 꼭 한 명 제대로 그려내고 싶었다", "주인이 같은 생존자들 옆에는 항상 묵묵히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더라고요. 마음의 상처는 다른 사람이 덮어주거나 지워줄 수 없죠. 진정한 회복은 스스로 자신의 몫을 인정하고 감당할 때 시작되는 겁니다.
그리고 장혜진 배우가 연기하는 주인이의 엄마가 계속 꽃을 사 오는데 계속 시들잖아요? 집안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온전히 집안을 돌볼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것 역시 마음 아프더라고요.
주인이 엄마를 유치원 아이 '누리'가 꼬집으면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해요" 라고 말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는데 그때 엄마가 "맞아, 나 아파"라고 답하면서 누리를 꼭 안아주는 순간, 와, 진짜 울컥하더라고요.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아픔을 감추고 살잖아요. 누리도 팔을 다치거나 감기에 걸렸을 때 아프다고 하지 않고 주인이의 엄마도 마음의 상처와 위장병이 있지만 혼자 삭히고 있죠. 주인이와 다른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고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세상은 우리한테 아픔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친구들의 뒷담화처럼요. 근데 이 영화는 그냥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게 회복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이의 엄마도 누리에게 아프다고 말하고 나서 다시 위장통이 오게 되고 수술을 받고 회복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주인이의 아빠는 자기연민에 빠져서 같은 고통을 앓고 있는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지더라고요. 이기적으로 보여서 밉다가도 고통을 공유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모습 같아서 짠하기도 하고 양가 감정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
영화는 주인이를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 바라봅니다. 주인이는 과거의 사건으로 자신의 현재가 정의되는 것을 거부해요.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 사건 하나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관련해서 윤가은 감독이 한 인터뷰가 인상 깊었는데요. "영화 속 주인은 사건 이후에도 뚜벅뚜벅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아주 보통의 우리들이다", "개인을 둘러싼 세계를 같이 조명하고 싶었다. 폭력에 의한 피해는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개인이 속한 세계가 피해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더라고요.
이게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때로는 사건 그 자체만큼이나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피해자가 밝게 웃고 연애하고 일상을 살아가면 의심하거나 그 피해의 무게를 과소평가하는 우리의 시선이, 사실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것을 영화는 정말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간 분석
그리고 학교, 태권도장, 집, 봉사활동 현장인 폐건물, 이 공간에 대한 묘사도 좋았습니다.
먼저 학교는 주인이에게 시련이 닥치는 곳이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익명의 쪽지나 친구들의 뒷담화처럼, 차가운 시선과 보이지 않는 압박이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이곳은 밝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게 다 보이는 공간, 즉 감시와 시선의 폭력이 작동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공간을 절망적으로만 그리지는 않습니다. 주인이를 끝까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친구 '공유라'가 있고, 또 마지막에는 그동안 주인이를 오해했던 '장수호'가 주인이를 살짝 꼬집으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서투르지만 진심 어린 연대의 시도들을 통해서, 이 차가웠던 학교라는 공간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고, 주인이에게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함께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태권도장은 관장님이라는 '좋은 어른'이 있고, 미도처럼 비슷한 상처를 가진 동료가 있는, 주인이에게는 일종의 안전기지입니다. 이곳은 주인이에게 태권도를 하면서 자신의 신체를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고, 관장님의 묵묵한 지지를 받으면서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불에 그을린 기둥을 굳이 칠하지 않고 그대로 둔 그 공간 자체가, 상처를 억지로 덮거나 지우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포용력과 따뜻함을 나타내주는 곳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집은 가장 복잡한 느낌의 공간입니다. 집은 분명 가족이라는 사랑의 울타리지만, 동시에 아빠의 부재나 엄마의 억눌린 고통처럼 해결되지 않은 아픔과 갈등이 공존하는 곳이거든요. 어둡지만 완전히 어둡지는 않고, 따뜻하지만 완전히 따뜻하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엄마가 집안에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사 오는 꽃이 결국 시들어버리는 것처럼, 따뜻함과 사랑을 향한 노력이 있지만 동시에 그늘진 현실의 무게가 공존하는 복잡 미묘한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마지막으로 폐건물 청소 봉사활동 현장도 정말 중요한 공간입니다. '폐건물'이라는 장소는 버려지고, 방치되고, 훼손된 공간이죠. 이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겪었을 '상처'나 '트라우마'에 대한 은유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행동이 '청소'입니다. 이 '청소'라는 행위가 바로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거나 덮어두는 게 아니라, 먼지를 털어내고, 깨진 조각들을 치우고, 다시 햇빛이 들 수 있도록 창을 닦는 그 행위 자체가 과거의 고통을 직면하고 스스로를 정돈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그 일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한다는 점입니다. 학교에서는 주인이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들 속에서 홀로 고립되지만, 폐건물에서는 굳이 자신의 아픔을 설명하거나 "피해자다움"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함께 청소를 하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일상을 나눕니다.
이 공간이 '생존자들'만의 '안전기지'라는 것은, 주인이가 남자친구를 데려왔을 때 미도가 격렬하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 명확해집니다. 그 고통의 맥락을 공유하지 않는 '외부인'의 등장은 미도에게는 안전기지의 침범으로 느껴졌을 겁니다. 반면 주인이는 '평범함'을 추구하며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싶었겠죠. 이 갈등은 회복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으며, 생존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속도와 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이 폐건물에서 주인이는 '판단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폐허를 다시 쓸모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나가는 '능동적인 노동의 주체'가 됩니다. 이 육체적인 노동과 동료들과의 연대를 통해, 주인이는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또 다른 방식의 힘과 위로를 얻는 겁니다.
결국 주인이가 차가운 '학교'의 세계에서 '피해자'로 규정되며 상처받고, 복잡하고 그늘진 '집'의 세계를 견뎌내는 과정에서, 따뜻한 '태권도장'의 세계를 통해 '좋은 어른'의 묵묵한 지지를 받고, 나아가 '폐건물'이라는 '생존자들의 연대' 공간에서 비슷한 아픔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스스로 상처를 정돈하며 회복해 나가는 그 여정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영화의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심하게 설계된 공간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영화는 상처를 끌어안고도 당당히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즉 '회복 탄력성'에 집중합니다. 고통에 의해 삶이 규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목적과 이야기를 스스로 찾아가는 주인의 용기 있는 여정을 따뜻하게 조명합니다.
"이제 다 괜찮아졌어"라는 식의 위로 대신에,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너는 네 삶을 살아갈 수 있어"라는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쿠키 영상은 따로 없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영화가 남긴 여운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주인>은 학교로 대변되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현실'과 그 속의 다양한 시선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따뜻함을 그려내는 작품입니다.
윤가은 감독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집약된 명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25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인 건 확실하고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나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사려 깊은 대답을 던져주는 영화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요? 다양한 감상과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저도 읽어보면서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