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바빠 현대인의 필수 HP 포션 아이스 아메리카노. 심지어 오늘처럼 살이 에는 날씨에도 '얼어 죽어도' 아이스 음료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비록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탓에 '얼죽아' 회원을 박탈당했지만. 여하튼 우리나라는 작은골목에도 카페 하나쯤은 흔하게 있을 만큼 커피를 파는 곳이 많고, 그만큼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는 그에 반하는 취향을 갖고 있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못 마신다.
현대인의 자격마저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말하긴 뭐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커피도 자주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 때 친구들과 카페에 가면 늘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를 골랐다. 가끔은 맛이 궁금해서 친구의 아.아를 마셔보곤 했는데, 시럽 한 방울 넣지 않은 무자비한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내 요거트 스무디로 입을 헹궜다. 으~ 너무 써. 애 같은 투정도 잊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며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더라도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 아.아는 여전히 내 입에 썼다. 대신 다른 커피는 괜찮았다. 공유가 모델인 카x 라떼는 적당히 견딜 만큼 쌉싸름하고 끝맛이 고소해 자주 손이 갔다(광고 아닙니다). 그즈음 카라멜 마끼야또도 곧잘 마셨다. 이렇게 말하면 꽤 다양한 메뉴를 즐긴 것 같지만, 사실 나는 한우물만 파기 때문에 카페에 가면 열에 여덟 번은 같은 메뉴를 찾았다. 아마 내가 마셨던 초코 라떼로 저어기 한강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장이다.
하루는 예전 직장에서 팀장님이 커피를 사준다며 같이 카페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이럴 때가 제일 난감하다. 첫 출근한 지 며칠 안 된 상황(아마 둘째 날이었다)에서, 상사는 물론 같이 입사한 옆 사원도 아.아를 고르는 와중에, 나만 좀 더 비싼 다른 메뉴를 조심스럽게 말해야 할 때... 아메리카노를 못 마셔서요, 라는 구차한 변명과 함께 말이다. 그런 걸로 일일이 신경 쓰는 소심한 사람이라구요? 하지만 제가 정말로 소심했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아.아를 골랐을 겁니다. 마치 직장 상사와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으로 통일하듯이...
그렇게 두어 번 아메리카노가 아닌 초코 라떼를 사주고 나서도, 팀장님은 내가 아메리카노를 못 마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괜찮았다. 나도 팀장님이 뭘 못 먹는지 잘 모르니까 쌤쌤이었다. 그래서 그날 팀장님이 우리 팀 전체에 쏘신 아.아도 감사히 받아 들었다. 그녀는 뒤늦게 생각났는지 아메리카노 못 마시는 거 깜빡했다며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앞서 말했지만 난 정말 괜찮았기에, 오히려 이번 기회에 아.아와 친해져 보고자 열심히 좀 마셔봤다.
하지만 위장을 바로 때려버리는 카페인의 위력에, 나는 사정없이 울려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렇게까지 알고 싶지 않았던 내 몸속 심장의 위치를 짚어보고 나서야 결국, 아.아 마시기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퇴근 전 화장실에서 일회용 컵에 반도 더 남은 커피를 버리며 아.아와 친해져 보자는 다짐도 함께 버렸다. 참고로 팀장님이 커피를 쏜 건 아침이었다. 하루 종일 마셨지만 반도 못 비웠다는 뜻이다.
그 후로 아.아를 다시 도전한 적은 없거니와, 나에게 카페인은 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른 커피도 별로 접하지 않았다.물론 콜라에는 환장한다. 커피와 콜라의 카페인 함유량 차이는 잘 모르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지 않던 나였는데. 요즘은 왜 자꾸 커피가 당길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얼마 전 마트에서 산 인스턴트 디카페인 라떼를 마셨다. 며칠 전 방 정리를 할 때도 카페인 충전이라는 명목으로 카라멜 마끼야또를 쭉쭉 빨았다. 전에는 1주일에 1잔이면 자주 마시는 축이었는데, 최근엔 며칠에 한 번은 마시는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입맛이 바뀌었나?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다 완성된 줄 알았던 내 취향에 아직도 변화될 구석이 남은 것 같아 새삼스럽다. 우습지만 '으른 입맛'으로 성장하는 기분도 들고.
언젠가는 나도 아.아를 HP 포션처럼 마시는 바쁜 현대인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되어봤자 좋은 점 하나 없다는 건 잘 안다.나는 아직 초코 라떼로 강 하나는 더 만들어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