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청소년 글짓기 대회 1999.6.5 유한재단
책상 한켠에 쓰지 않는 원목의 원형 연필꽂이가 하나 있다. 방 대청소를 할 때마다 버려야 하는 물건 후보에 오르지만 유독 그 연필꽂이만 버릴지 말지 고민하다 간신히 다시 책장에 올려진다. 그 연필꽂이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전국 청소년 글짓기 대회 1999.6.5 유한재단'
중학교 시절 꿈은 별밤 작가였다.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떠올렸다면 맞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내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였다. 다이어리나 노트 한구석에 주파수 95.9MHz와 10시~12시 별밤 게스트를 메모해놓고 좋아하는 게스트가 나오는 날은 녹음을 위해 공테이프를 대기해놓고는 했다. 때때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밤 10시가 되면 자연스레 라디오를 들으며 잠드는 게 하루 일과였다.
물론 라디오 프로가 별밤만 있던 건 아니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 라디오를 틀면 6시에도 8시에도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도 다른 주파수에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각자의 주제를 가지고 방송을 했다. 하필 유독 별밤에 집착했던 이유는 언제나 그 시간에 있어주었던 문세아저씨, 이문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별밤을 처음 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별밤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다음 별밤지기인 이적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던 꼬꼬마 시절이 있었다. 그 정도로 어린 내게 별밤은 큰 부분이었고 라디오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고 기왕이면 별밤 작가가 되는 것이 내 최종 꿈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안타까운 것은 별밤 작가가 되는 방법을 몰랐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만 검색해도 배워야 하는 과정과 진로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작가로서 전망이 좋은 다른 직업군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때는 확실하게 꿈이 있고 부모님이나 어른이 도와주지 않으면 길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저 그때 들었던 말은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였다. 정말 안타깝게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거나 부모님이 나의 진로에 좀 더 관심을 가졌거나, 차별이나 편견 없이 상담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늘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때는 성적도 더 떨어져 중하위권이었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을 때쯤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반 친구가 내게 유한대학에서 진행하는 글짓기 대회를 나가보라고 추천을 해주었다. 수상 경력이 있으면 국문과나 문예창작과에 진학할 때 점수가 플러스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혼자 지하철을 타고 유한대학을 가 글짓기 대회에 참석했다. 그때 참석자 모두에게 나눠준 기념품이 그 연필꽂이였다. 어떤 내용을 썼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고 상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1호선 역곡역에서 내려 걸어가다 본 학교의 풍경은 그 후 몇 년 동안 내 안에 신기루처럼 남아있던 걸로 기억한다.
재작년 퇴사 후 대대적인 방 청소를 한 적이 있다. 책장도, 책상도 새로 사면서 방에 오랫동안 묵혀둔 것들을 모조리 꺼내 거실에 쌓아두고는 하나하나 다시 방에 들어갈 것과 버릴 것을 걸러냈었다. 그때도 이 연필꽂이를 버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다른 물건들은 추억이고 뭐고 미련 없이 쓰레기봉투에 재활용 박스에 버렸는데 유독 그 연필꽂이만큼은 쓰레기봉투에 들어가는 것에 마음이 요동쳤다. 결국은 한때나마 별밤 작가를 하고 싶어 했다는 증거를 잘 보이지 않는 책장 아래쪽에 다시 세워두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작가가 된 나를 상상해본다. 내가 만약 작가가 되었으면 어느 장르를 하고 있을까. 드라마? 라디오? 아니면 시사프로? 내가 쓴 글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같은 상상말이다. 물론 현실의 방송작가는 내 상상 속의 작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힘든지는 알 수 없어도, 최소 지금 내가 회사에 앉아있는 이 순간만큼 힘들 것이라는 것은 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연필꽂이를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거기에 새겨진 글씨를 곱씹어보며,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을 담아 작가로 성공할 판타지를 여전히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