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사람
고모가 너무 보고 싶은 요즘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어릴 적 나를 많이 아껴주던 분이 있었다.
강원도 철원에 사시던 아빠의 누이 작은 고모였다.
아빠는 의정부에서 차로 1시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집 4남매 중에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10살 터울의 형과 그 위로 나이 차이가 더 많이 나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그중 둘째 고모가 일찍 결혼하셨고 나이 어린 동생을 당신의 집에서 자식처럼 키우며 살았다. 그리고 그 동생이 성인이 되어 객지에 나가 결혼해 생긴 첫 자식이 바로 나였다. 고모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고모에게 나는 너무나 애틋한 존재였다.
어릴 적에는 큰아빠 집을 가는 걸 싫어했다. 큰엄마와 큰엄마의 자식들이 우리 집 가족들이 명절마다 그 집에 가 하룻밤 보내고 가는 걸 엄청나게 싫어했다. 그럼에도 일 년에 두 번, 명절마다 기어이 아빠 차에 올라탔던 이유는 큰아빠 집에서 하룻밤 보내기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철원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일이 음력으로 치면 1월 1일 구정 날이다. 엄마는 폭설이 내리는 구정 날 큰집에서 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어른들은 으레 생일을 음력으로 지내니 큰집에서 구정을 지내고 고모 집으로 가면 정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생일상이 해마다 차려져 있었다. 특히 나는 고모가 쑤어준 도토리묵을 제일 좋아했다.
고모 집에 도착하면 바로 주방으로 향했는데 고모표 수제 도토리묵이 자주색 김장 김치통 하나에 가득 채워져 있는 걸 확인하고 나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다. 너무 좋을 때는 주방 바닥에 앉아 김치통을 다리 사이에 끼고 수저로 양념 없이 묵을 퍼먹기도 했다. 도토리묵이 쓰다고 누가 그러던가. 그보다 달콤한 음식이 없는 것을. 철원에 있는 내내 삼시세끼에 묵이 올라오고도 반 통이 남았는데, 그 남은 묵도 차에 타는 내 손에 쥐어주셨으니 고모의 애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크기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고모는 잘 때도 나를 품에 안고 손을 꼭 잡고 함께 자기도 했다. 흔히들 할머니에게서 사랑받은 기억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 대상이 고모였다. 고모는 엄마에게도 나는 귀한 아이니 귀하게 키워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신신당부도 했었다. 고모 얘기를 하면 엄마는 그 때 고모 말에 속아 어린 나를 살림을 시키지 않은 것이 가끔 후회가 된다고도 했다.
늘 나를 아끼고 애틋해했던 고모는 내가 20대 초반쯤 암에 걸렸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병문안을 갔을 때도 내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걸 보고 싶다며 우셨다. 비혼주의인 걸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다음에 또 올테니 건강하시라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고모 아들 그러니까 사촌 오빠에게서 들은 얘기로 마지막까지 나와 아빠를 찾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고모의 마지막을 연락받고도 가지 않은 아빠를 한동안 원망하기도 했다.
그때쯤의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고모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할머니가 꿈에 나타났었다. 집은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이었고 내 방에서 할머니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깨고 나서 어렴풋이 얼마 안 있으면 고모가 돌아가실 거라는 걸 짐작했다. 그리고 정말 일주일 후 고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 년에 두어 번 밖에 만나지 않는 고모임에도 나도 애정이 컸는지 그 후 거의 5년은 도토리묵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요즘도 도토리묵을 먹을 때면 고모가 해준 것만큼 맛있는 걸 먹어본 적이 없다며 고모를 떠올리곤 한다.
돌아가신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마음이 힘들 때면 종종 고모가 생각난다.
사진도 없어 얼굴은 흐릿하지만 고모 집의 구조와 풍경, 나를 안고 토닥토닥 재워주던 고모의 냄새, 소리. 한적하고 스산했던 철원의 길거리 풍경은 어쩌면 미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소중하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했던 사람, 고모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