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준, 정지돈
- 바벨(정용준)
읽는 내내 책에서는 지독한 페인트 냄새가 났다. 꼭 ‘바베 시대’의 후각적 감각이 4D로 표현된 것 같았다. 『바벨』의 바벨 시대에는 말이 펠릿화 되어 사실상 말이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얼음의 나라 아이라’ 이야기는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주인공에게도 그러했듯 말더듬이 노아에게 위로가 되었고, 보통의 인생이 그러하듯 그가 의도치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거대한 암흑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졌다. 모든 전염병이 그렇듯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라 믿었고 학자들과 의사들이 해결하리라 믿었다. 믿음은 시간에 반비례했다.” 코로나 시대처럼 바벨의 시대도 그랬겠지. 그리고 믿음이 바닥날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시 낭송을 좋아하던 '장'마저도 혀를 잘랐다. “특별한 일도 아니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막상 자르고 보니 아무렇지도 않구나. 노래하는 것, 시를 쓰고 그것을 낭송하는 것, 그것은 젊음과 같은 것이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 덩달아서 나도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된다.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 폐렴이 잇달아 발생하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전 인류는 마스크를 피부에 이식하고, 후세 인류는 입과 코가 땀구멍만큼 작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 시티 픽션(조남주 정용준 이주란 조수경 임현 정지돈 김초엽)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반가워서, 반가운 이야기를 편식하며 골라 읽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줄거리를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할뿐더러 책을 읽은 지 시간이 좀 지나서, 단편 소설들 중 또렷이 기억나는 점이 많지 않다. 다만 우리 엄마 아빠가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아파트 카페를 소재로 한 「봄날아빠를 아세요?」(조남주)의 구성이나 정지돈식 유머가 묻어나는 SF 「무한의 섬」이 기억에 남는다.
「무한의 섬」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국회의원을, 집주인을, 내 주변인들을 빼앗아간다. 혼자 남은 ‘나’에게 ‘존재’는 말을 건다. 완벽히 혼자가 되어 존재를 마주 보는 상상은 SF적이기도 하며 현실적이기도 하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깜깜한 천장을 우주로 가정하고 몸이 붕 뜬 것 같은 채로 비슷한 상상을 하곤 하니까. 혹시 지금까지 나는 SF와 현실을 너무 양분화 해왔던 걸까? SF는 영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을 읽지 못했던 나에게 이 이야기가 힘이 될 수도 있겠다.
「허공의 아이들」(김성중)을 읽고도 느꼈던 것이지만, 나는 ‘빼앗아가는 구성’이 좋다. 그러나 ‘없어 봐야 그 소중함을 알지’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오히려 부재가 가져오는 이상한 ‘안도감’이 있다. 그러니까 『바벨』과 「무한의 섬」에서는 없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이제는 없어진 것’을 가리키기보다 ‘없어지고 나서 남은 것들’을 조명한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