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경 May 03. 2019

한병철「피로사회」【서평】

우울하지 않고 피로해지는 법

라디오를 듣다 보면 각양각색의 고민들이 쏟아진다. 그중에서 직장이나 학교 등에서 성과가 잘 안 나와 자신에게 실망했다며 응원을 부탁하는 사연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 사연을 들은 DJ나 청취자들은 사연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현대인이 겪고 있는 증상이라며, 조금만 더 힘내자고 격려를 하곤 한다. 이런 종류의 사연들에 대한 답변으로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건네면 어떨까? 어떤 다정한 DJ보다도 훌륭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저자는 사회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부터 현대인들의 고질적인 우울감, 피로감을 진단하고자 한다.      


21세기의 사회는 이전의 ‘규율 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성과사회’이다. 규율 사회의 키워드가 ‘복종적 주체’, ‘명령’, ‘부정성’이라면 성과사회의 키워드는 ‘성과 주체’, ‘주도’, ‘긍정성’이다. 성과사회에서는 타자에 의해 억압받지는 않지만, 자기가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더 잘할 수 있다, 조금만 더’와 같이 무한 긍정의 프레임으로 자기를 계속 밀어붙이며 결국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현상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와 결단력이 부재된 ‘민주주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저자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를 아직 성과사회의 주문을 받지 않은 규율 사회의 인물로 구분 짓는다. 그리고 그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은 아무 의욕도 없는, 무감각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내가 「피로사회」를 읽기 전에는-그러니까 규율 사회와 성과사회라는 개념을 몰랐을 때-저자와 다른 관점으로 바틀비를 해석했다. 일단 나는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을 필경사 바틀비가 아닌 인간 바틀비로 살아가기 위한 그의 용기이자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바틀비는 필경사 이전에 수취인 불명 우편 처리소 직원이었는데, 마치 보내고 받는 고정된 우편 처리 시스템에서 벗어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취인 불명 우편처럼, 그도 “I would prefer not to”라고 반복적으로 말함으로써 자신을 지켜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바틀비에 대한 저자와 나의 관점 차이는 ‘바틀비를 어떤 사회의 인물로 보았느냐’에서 비롯된다. 규율 사회에서는 저항의 대상이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에-이를 테면 타인의 명령, 억압- 저자는 “no”로 일관하는 바틀비의 행위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반면 성과사회는 이전과 달리 저항할 대상이 불특정 해지고(이를 테면 전체적인 사회구조), 광범위해지면서(자기 착취의 경우 자기 자신까지 포함된다.) “no”라고 말하기 매우 힘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성과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바틀비를 긍정한 것이다. 즉, 규율 사회보다 성과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이것이 저자가 한트케의 「피로에 대한 시론」의 개념을 빌려 언급한 ‘탈진의 피로’, ‘분열적인 피로’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1)     


 ‘피로사회’라는 제목은 현대사회와 같은 말이기도 하면서 저자가 희망적으로 구상하는 미래사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는 앞서 말한 ‘탈진의 피로’, ‘분열적인 피로’와 대비되는 ‘영감을 주는, 부정적인 힘의 피로’로 갈 수 있는 방법으로 ‘깊은 심심함’, ‘춤’과 같은 방법을 제안한다. 2) 근래에 등장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나나 랜드’(남의 시선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돼 소비한다는 의미)와 같은 단어들은 사회적 구조로부터 자기를 착취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회적인 구조와 그 속의 개별 인간은 끊임없이 상호작용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성과사회의 구조에서 벗어난 ‘춤’과 같은 몸짓들이 늘어난다면 저자가 희망하는 피로사회가 머지않아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1) 한병철, 「피로사회」 e-book, 문학과 지성사, 2012, 70쪽.

2) 위의 책, 31, 71쪽.

매거진의 이전글 2014.4.16-2019.4.16【에세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