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경 May 12. 2019

소비에 관한 징크스【에세이】

나를 탓하고 싶지 않은 강박에서 비롯된 징크스

0. 나에게는 반복되는 우연이 몇 가지 있다.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볼 때 내 생일(8월 19일)인 8시 19분을 유독 자주 본다든지, 시험을 볼 때 비가 오면 그날 시험은 꼭 망친다든지 등등. 그런데 이런 반복적인 우연이 –가령 후자의 예시처럼- 안 좋은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징크스’라고 부른다.     


징크스(jinx)는 고대 그리스에서 마술에 사용하던 새의 이름(jugx)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징크스는 마술과 같이 사람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불길한 일이나 운명적인 일을 의미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는 소비에 관한 몇 가지 징크스가 있다.      


1. 살 때 완벽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완전 마음에 들면 심장이 뛴다는지 눈이 번쩍 뜨인다든지 생물학적인 반응이 있다- 그 물건에 대한 애착이 쉽게 없어지고 좀 더 가서는 버리고 싶어 진다. 사실 이건 자연스러운 사람의 심리 변화 일수도 있겠지만, 굳이 이것을 징크스라고 하는 이유는 주로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 그렇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강요에 가까운 설득을 하는 -다소 부담스러운- 직원분의 기에 눌려 물건을 구매하는 상황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엄마와 같이 옷을 사러 가면 직원분께 옷이 별로라고 말하기 미안해서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소심했다) 엄마만 마음에 드는 옷을 사면, 꼭 그 옷은 몇 번 입지 못하고 작아져 의류수거함으로 가게 되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몇 달 전에 구매한 젬베도 어김없이 이런 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는 정처 없이 걷다가 우리나라 낙원상가 같은 곳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젬베, 기타. 바이올린 등 악기를 파는 상점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을 한참 구경하고 나서 악기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일단 사고 유튜브로 연습해보자는 (안일한) 생각으로 악기를 사겠다고 마음을 굳혔는데,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는 정말 재능이 없던 나는 악보를 볼 필요가 없는 젬베를 선택했다. 중국에는 뭐든지 다 파는 ‘타오바오’라는 쇼핑몰 어플이 있는데 그곳에서 젬베를 주문하자니 배송 중 악기가 망가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징크스를 무릎 쓰고 (자칭) 중국판 낙원상가로 향했다. 사실 이곳에서 직원분은 어떠한 강요를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직원분이 골라주는 젬베를 순식간에 사버렸다. 아마 이번에는 젬베를 연주하는 환상에 빠져 당장 젬베를 사고 싶다는 욕심이 징크스의 원인 된 듯싶었다. 살 때 젬베의 디자인이 100%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처음’ 들어간 젬베 가게에서 직원분이 '처음으로'소개한 젬베를 덜컥 사버렸다.      


그리고 한 3번 연주했던가? 그 후로는 옷장 옆에 젬베를 고이 모셔두었다. 젬베 디자인이 촌스럽고, 너무 흔한 것 같아서 볼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국할 때 버리고 가야 하나, 아니면 샀던 곳에 도로 팔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러다가 ‘다큐멘터리 3일-낙원상가 편’에서 기타를 수리하러 공연 전날 부산에서 낙원상가를 찾아온 한 청년이 생각났다. 악기는 가격 따라 가지만 형편이 안 돼서 지금은 30만 원짜리 기타로 공연을 하고 있다는 그 청년에게서 음악과 악기에 대한 간절함이 느껴졌다. 징크스를 떠나 나는 애초에 악기를 구매할 자격이 없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젬베에게 미안해서 물티슈로 정성 들여 닦아준 후에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10cm)’에 맞춰 연주를 해보았다. 그리고 귀국할 때 젬베를 꼭 가져가겠다고 다짐했다. 디자인은 마음에 계속 걸리겠지만 장난감 삼아서라도 젬베를 계속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이 결심이 오래갈 수 있으지는 미지수다.)

 

2. 다이어리 소비에 관한 징크스도 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다이어리를 바꿔야 직성이 풀린다. 만약 이때 다이어리를 바꾸지 않는다면 뭔지 모르게 어수선한 느낌이 든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일 년에 하나씩 꾸준하게 한 다이어리만 쓰는 게 가능했었는데, 대학생이 된 후부터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시간을 좀 더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 ‘스터디 플래너’만이 아닌, 일기장 겸, 메모장 겸, 일정 기록용 겸 등으로 여러 가지 용도에 최적화된 다이어리를 찾다 보니 이런 징크스까지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지금의 다이어리를 바꾸고 싶어 저번에 쓰다만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개조해서 쓰려고 했는데, 그 다이어리를 다 찢어놓고야 마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손재주가 없는 나는 역시 그것을 영원히 쓸 수 없게 아예 망가뜨리고 만 것이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게 좋을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생길수록 나에게 더 잘 맞는 다이어리 디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고등학교 때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해야 하는 일만 줄줄이 나열하는 식의 쓸모없는 다이어리는 더 이상 쓰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이 징크스가 찾아올 때마다 돈은 들더라도 마음은 내심 즐겁다. 신기한 디자인의 아기자기한 새 다이어리를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다.     

ps.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선물해준 언니에게 괜히 미안하다. 앞으로 다이어리는 내 돈으로 살게..

     

0. 징크스는 강박이다. 시험을 망친 핑계를 차라리 날씨 탓으로 돌리고 싶은 강박, 젬베를 사놓고도 연주하기 귀찮고 아직 젬베를 잘 못 다루는 것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해서 그렇다고 쉽게 결론짓고 싶은 강박, 다이어리를 사면 그동안 미뤄왔던 일이 다 리셋되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한 강박. 뭐든 내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강박에서부터 징크스는 시작된다.      


*강박 :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심리적으로 심하게 압박을 느낌.

*징크스 :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으로 여겨지는 것. 

작가의 이전글 정서적 위생관념 기르기【에세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