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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경 Sep 12. 2019

이선영『60조각의 비가』
【문학나눔 선정도서】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 서평단 붘어 2기

비를 온몸으로 맞아본 적 있나요?
빗방울이 아주 시리게 느껴지도록.     


입안에서 터지는 이 부드러운 포도알 속에도

그냥은 삼킬 수 없는 응어리라는 듯 씨가 맺혀 있다. 


_「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中 1)


2009년 당시 이선영 시인이 6년 만에 낸 시집인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에서 시인은 “부드러운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라고 말한다. 2019년, 8년 만에 낸 이선영 시인의 새 시집 『60조각의 비가』의 ‘비’에도 “그냥은 삼킬 수 없는 응어리라는 듯” ‘비가(悲歌)’가 담겨있다. 시인은 60편의 시를 통해 60조각의 묵직한 비가(悲歌)를 노래한다.     



_「21세기의 비」 中 2)  

   

21세기는 “추락하고, 부서지고, 끊어지고, 토막나고, 파묻히고, 실종되고”, 또다시 “추락하고, 부딪치고, 흔들리고, 투신하고, 목매달고, 쓰러지고, 잘라내”는 비로 점철된 장마철이다. 시어의 배치는 비를 이미지화하는데, 이는 비가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시어들이 읽는 이의 눈에, 손에, 온몸에 날카롭게 박히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21세기의 비」는 주어만 바뀐 채 반복되는 –뉴스에서 숱하게 보도되는- 잔인한 사건들을 술어의 나열만으로 강렬하게 묘사한다. 이밖에도 시인은 「4월 비가」와 「열아홉이 깨운다」라는 시를 통해, ‘세월호 참사’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를 상기시키며 현대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직시하고자 한다.      



맘대로 살 수도 없지만 맘대로 죽을 수는 더 없고

살아도 치욕이지만 죽는 건 더욱 굴욕인,

다 내가 아니라지만 또한 그게 다 나라고도 하는

이 무서운 퍼즐


_「마지막 50조각의 퍼즐」 中 3)    

 

현대사회에 대한 시인의 비가(悲歌)는 ‘타인’으로 옮겨지면서, 시인은 ‘생’에 대해 보다 세밀하고 깊은 고민을 이어간다. 50대의 시인은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규정되는 것이 “무서운 (50조각의) 퍼즐”이라고 말하면서도, “살아도 치욕이지만 죽는 건 더욱 굴욕”이기에 인간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타인의 시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슬픈 운명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2부의 제목인 ‘눈과 귀는 면방 사우’를 이루는 말이기도 한 「면방 사우(面房四友))」, 「계단과 나, 삐걱거리는」, 「나는 나는. 나비」라는 시들을 통해, 시인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타인과 애써 어울리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하며, 영영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하며 탄식하기도 한다.



찌개 냄비도 끓어오르면 뚜껑을 열어야 하고

밥솥도 익으면 뚜껑을 열어야 하고

사랑도 익으면 문을 열어야 하고

열어야 넘치거나 썩지 않고 우주로 통하느니     

(중략)     

뚜껑이 없어 영영 닫힐 리 없는 줄 아느니

찰기 없는 발바닥을 더욱 끈적하게 붙이고 저마다

지구의 직립한 뚜껑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로

밤낮 복닥거리지만 지구는 냄비 속 곧잘

시래기 타래가 흘러넘쳐 후끈 발을 데이는 행성     


 _「지구의 뚜껑」 中 4)


‘지구’라는 냄비는 뚜껑이 없다. “지구의 직립한 뚜껑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지구에서 뜨겁게 데워지고 있다. 그렇게 뜨겁게 데워진 수증기가 올라가 지금, 여기, 뜨거운 비로 내리고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너무도 단단한 뚜껑이 되어가고 있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지 영문도 모른 채 뜨겁게 고통스러워할 뿐이다. 지구가 끓으면서 지구의 뚜껑은, 지구의 뚜껑을 자처한 사람들은 높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들썩인다. 자세히 들어보면, 들썩들썩 ‘비가(悲歌)’ 같은 소리가 난다. 이제 뚜껑을 열고, 고개를 들고, 팔을 벌려 『60조각의 비가』를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빗방울 속 비가(悲歌)가 아주 시리게 울려 퍼지도록.

     

이선영, 『60조각의 비가』, 민음사, 2019.



이선영 시집 『60조각의 비가』(민음사)는 ‘문학나눔 선정도서’이며, 위 서평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19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의 “서평단 붘어 2기”로 선정되어 작성했습니다.




1) 이선영,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 2009, 40쪽.

2) 이선영, 『60조각의 비가』, 민음사, 2019, 32쪽.

3) 위의 책, 46쪽.

4) 위의 책,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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