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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경 Oct 10. 2019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문학나눔 선정도서】

지금 여기, 서정시

서정시, 좀 낯간지럽다. 나에게 서정시하면, 숲속에서 화자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산수시와 같은 ‘순수 서정시’가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현대 미래파 시들은 서사화(산문화)되어가고 생략이 많아지며 이미지즘을 선호하는데, 지금 여기 서정시를 읽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파일명 서정시』의 ‘서정시’는 나희덕 시인이 다시 쓰는, 현대인의, 아름다울 수 없는 서정시다. 시집 제목은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감시하면서 그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에 붙인 이름 (Deckname <Lyrik>)에서 차용한 것이다.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파일명 서정시」1) 中     


‘서정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감시받았던 시인 라이너 쿤쩨를 닮아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나희덕 시인은 들춰내고자 한다. 『파일명 서정시』는 현대 사회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엿가락처럼 흰 철근들과

케이지를 가득 채운 닭들과

위태롭게 쌓여 있는 양배추들과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원목들을 싣고  

   

트럭들은 무엇을 실었는지도 잊은 채 달린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이 도시의 트럭들」2) 中     


‘맨발로 걸어 나온 화자’(「파일명 서정시」)는 뭔가를 가득 담고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트럭’을 관찰하고 있다. 트럭에 실려 있는 것,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 트럭이 달리는 도로 모두 ‘죽음 쪽’에 가깝다. 「종이감옥」과 마찬가지로, 화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정해진 길과 방향만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습을 꼬집는다. 이 사회가 죽음의 이미지로 물들어갈수록, ‘트럭들이 무엇을 실었는지 잊어가듯’ 우리는 우리 생의 본질을 잊어버린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

책상 밑에 의사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 탕, 두드리는 손들,

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  

   

「난파된 교실」3) 中     


한 낭독회에서 나희덕 시인은 현대 사회의 특히 아프게 다가온 지점이 ‘세월호 참사’였다고 말한바 있다. 「난파된 교실」을 비롯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문턱 저편의 말」의 시들이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깊숙이 다루고 있다. 참사 이후, 1000일이 훌쩍 지나서야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다만, 참사의 진상규명이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여전히 ‘아이들은 교실에 갇혀 있다’. 감히 그 슬픔을 위로할 수 없지만, 진실이 갇힌 ‘유리창’을 깨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릴 지라도 그 창을 계속 두드려야만 한다.     

 

-비둘기와 뱀 중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까?

-진실은 비둘기와 뱀 사이에 있습니다.    

 

-이 불가능한 자음들은 어떻게 발음해야 합니까?

-모음을 침처럼 섞으면 됩니다.      


「저녁의 문답」4) 中     


진실은 ‘비둘기’같은 평화로움과 ‘뱀’같은 죽음 사이에 있다. 진실은 ‘자음’을 닮은 불가능성과 ‘모음’을 닮은 가능성이 합쳐져 발음된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세상에서 진실을 알아내기란, 다시 말해 「파일명 서정시」의 ‘그’가 걸어 나오기란 점점 힘들어 보인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하늘을 보며 서정시에게, 나에게 ‘진실을 담을 수 있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인 듯 노을이 울먹거리며 타올랐다.


지금 여기, 서정시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창비)는 ‘문학나눔 선정도서’이며, 위 서평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19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의 “서평단 붘어 2기”로 선정되어 작성했습니다.



1)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18, 16쪽.

2) 위의 책, 52쪽.

3) 위의 책, 46쪽.

4) 위의 책,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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