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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경 Nov 01. 2019

하얀 지렁이 【시】

 

장마전선이 북상한 내 방은 구름보다 위에 있다.     

장마가 시작된 저녁에는 에이포지를 벽에 이어붙이고 낙서(樂書)를 했다.

볼 수가 없으니, 덩-덕 쿵 덕 쿵

냄새를 맡으며, 덩기덕 쿵 더러러러

경계 없이 창과 벽에 부딪치며 춤을 추었다.    

 

그러다 한밤중에는 차가 쿵 부딪히는 소리 다음으로 경찰차 사이렌이 들려왔다

사고를 연기하는지 사고로 연기가 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다만, 빨간빛에 쪼일까봐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낙서를 해야 했다.     


장마가 물러간 아침에는 강박적 취침을 모퉁이로 몰아 접고

일어나니, 

잉크 없었던 펜, 발톱, 이빨, 털, 살로 하얗게 상처 난 벽이다

내 집이 아닌 내 방에서 

벽이야 벽하며 벅벅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에 스카치테이프 자국이 난 에이포지를 담는다.      


가만, 내 목구멍에서도 벅벅 소리가 나는데 

장마를 믿고 멀리 나온 지렁이는 이제 죽음을 믿고 울어버릴 수 있단다. 

달팽이보다는 빠른 걸음으로 미끄덩댔을 뿐인데

태생적으로 유연한 달팽이는 제 몸이 제 집이 될 수도 있다는데    

 

번개 같은 무지개가 내 몸을 관통해서

색이 많아 색을 잃은 하얀 지렁이가 된다.      

오, 하얀 지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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