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촘촘한 리셋(1)
난 정리하는 걸 좋아한다. 아니, ‘리셋’을 좋아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려나. 그래서 다이어리나 공책을 끝까지 쓴 적이 거의 없다. 이를테면, 단어 정리를 해놓은 공책을 훑어보다가 다시 새로운 공책에 옮겨 적고 싶은 충동이 든다.
예전에 쓰던 아이폰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먹통이 되는 바람에 기록들을 정리하지 못했었다. 최근에서야 아이클라우드에 그대로 남아있는 아이폰의 메모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중에는 꽤 쓸 만한 것들도 있었다. 이제, 그 메모장을 ‘리셋’ 해보려고 한다. 아, 여기서 리셋은 0의 초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기록해두고 싶었던 것을 다시 찾아내는 과정이라는 점에 주의하자.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인지 더 많은 과거를 더 빠르게 ‘리셋’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느리고 촘촘한 리셋’.
2018년 어느 날 : 영혼은 길거나 짧은 빛줄기다. 어느 것이 더 좋다는 것은 아니다. 짧은 건 단단한 구슬 같고 긴 것은...... 몸을 떠난 영혼을 땅뿐만 아니라 하늘의 별을 통해서도 묻어줄 수 있다는 상상은 이젠 조금 고리타분하기까지 하지만, 어쨌건 사막에서 별과 은하수를 보며 남긴 어느 탐험가의 탐험 일기에는 좀 더 생경하게 쓰여 있는 것이었다.
2019. 7. 12 : 밖에는 비가 조금씩 오고 있었다. 하굣길의 아이들은 우산을 썼다. 아마도 등굣길에 누군가 서둘러 챙겨준 것이리라. 장을 본 후 버스를 탄 엄마에게는 우산이 없어 보였다. 대신 그의 머리에는 무당벌레가 붙어있었다. 그것은 비가 제법 많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버스에서 내려야 했던 그의 우산이 되었다. 버스의 뒷문이 열리는데, 다가오는지 멀어지는지 알 수 없는 앰뷸런스 소리가 빗줄기 사이사이로 더 크고 날카롭게 들렸다.
2019.6.13 : 동물원에서 아기코끼리를 보았다. 다리는 녹슨 쇳덩어리로 묶여있었지만 꼬리와 코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코와 꼬리가 뭉뚝하지 않고 긴 운명이 유일한 기쁨이라는 듯이.
오늘_읽고 듣고 본 것
『책섬』(김한민, 워크룸)은 책이 “내 느낌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뭐, 소위 뻘짓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온전히 나에게 유의미한 뻘짓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읽다가 작가의 비유들이 마음에 들어, 이 작가가 좋아한다는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의 문학에도 관심이 생겼다.
이랑의 유튜브 ‘lang lee’에 들어가 ‘ASMR LIVE #1.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들었다. 이어서는 ‘잘 듣고 있어요’ 뮤직비디오를 보고, 그가 찍어둔 몇 편의 짧은 영화들도 보았다. 목소리와 이야기가 잘 어울렸다. (이 글을 쓰는 중간에도 ‘ASMR LIVE #2. 가족을 찾아서’가 업로드되어 그것도 들었다.)
2020.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