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거니즘
미용실 의자 밑에 머리칼들이 가득하다. 머리카락이 너무 상하고 엉켜서 오랜만에 미용실에 갔다. 길게 무거웠던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내고 나니 한결 가벼웠다. 부드러운 단발이 된 머리를 연신 만지며 집으로 돌아온다.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여서인지, 허기가 졌다. 후다닥 점심 먹을 준비를 한다. 오늘의 메뉴는 현미밥, 멸치, 두부조림, 열무김치다. 내가 본격적으로 육류를 먹지 않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김한민의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이다. 폴 매카트니는 “도살장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면, 모든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1)라고 말한 바 있는데, 공장식 축산의 잔혹함은 굳이 영상이 아닌 글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비건(vegan)'은 보통의 채식주의자를 넘어 모든 행동 영역에서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한 운동을 말한다. 채소 중에서도 지역 먹거리를 선호하며, 동물의 가죽이나 털로 만든 옷은 사고 입지 않는 식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비건이 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주문한 김밥에는 나도 모르게 '햄'이 들어있었고, 제일 좋아했던 과자에는 알고 보니 '쇠고기'가 함유되어 있었다. 아직은 비건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페스코 베지테리언에서 어류, 유제품, 달걀 등을 비워내는 일도 남아있다. 하지만 비건이 되어가는 어느 단계에서든 매 순간 -사랑하는 내 (강아지) 친구 ‘여름’ 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과 환경을 위해, 그동안 막연하게 ‘보약’처럼 여겨왔던 습관들을 재검토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다큐 프라임 '뇌로 알아보는 인간'에서 '미토콘드리아 이브’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알게 되었다. 미토콘드리아 이브는 모든 인류의 공통조상으로 추정되는 개념인데, 한 인간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 거슬러 올라가며 모계의 유전물질을 찾다 보면 그 뿌리가 보이게 된다. 2) 나아가 이 개념을 바탕으로 인류의 유전적 구조를 살펴보면, 한 우리에서 같이 지내는 침팬지의 유전적 거리보다 지구 정반대 편에 사는 사람 사이의 그것이 더욱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류는 무수히 긴 지구의 역사에서 개체수를 단기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려나간 유일무이한 존재다.
하지만 인류의 이런 엄청난 성장 비결이 단순히 인류가 유전적으로 월등하거나 운이 좋아서였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보다 그동안 미필적 고의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온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코로나 19를 비롯한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등 바이러스 전염병의 잦은 출몰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전 지구적 감염병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무차별한 자연개발, 생명과 환경 파괴, 공장식 가축농장의 비윤리적 사육 방식, 야생동물 식용 거래 등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나아가 코로나 19로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된 관광지들이 얼마나 더 아름다워졌는지에 대한 기사들만 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면서 '인간만의 성장'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엉키고, 얽혀있다. 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요즘, 최소한의 해를 끼치며 지구에 머물 수 있는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자주 되뇌게 된다.
1) 김한민, 『아무튼, 비건』, 위고, 2018, 37쪽.
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7277&cid=58943&categoryId=58966
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192057005&code=61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