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퇴사 전에 할 일

by 맨아래접시

내일 마지막 출근을 끝으로 한동안 우리 자리에 아무도 없다. 애착을 가지고 일했던 사업이라 막상 떠나려니 걱정부터 앞선다.

지난주 금요일 퇴근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는데 어제 팀장에게 퇴사 의사를 밝히고 나니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뭐부터 해놓고 가야 할지 가늠이 안가 퇴사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쭉 적어봤다.


퇴사 전에 해야 할 일들

1. 병가, 공가 등 휴가 챙기기
2. 건강검진하기
3. 보수교육 듣기
4. 휴가비 지원받기
5. 관용차 점검하기
6. 물품수량 파악하기
7. 식권 다 쓰기
8. 커피쿠폰 다 쓰기
9. 책상 주변 정리하기
10. 직장 동료들에게 감사인사 전하기


진작에 챙겨서 해야 하는 일들이었지만 계획적으로 움직이기보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라 퇴사 하루 전이 돼서야 빠진 게 없나 짚어보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1번부터 10번까지 어떻게 꾸역꾸역 적다 보니 이제야, 마지막 인사를 하며 건넬 간단한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지난주, 주말만 해도 문득문득 어떤 선물을 준비할까 하다가 이미 실망감이 큰 직장에 별다른 미련이 없어 마음이 썩 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마지막 출근 하루를 앞두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밝은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1년에 서너 번씩 오는 낯익은 아저씨 얼굴이 보였다. 여름에는 여성용 스타킹이나 발목양말,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목이 긴 양말이나 도톰한 남성용 양말, 혹은 내의도 가지고 오셨다. 덕분에 코로나가 한참이었던 지난겨울에는 질이 좋은 얇고 따뜻한 내의를 입고 선별진료소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지 다리 한쪽을 저는 아저씨는 물건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왔지만 언제나 높은 음정으로 힘차게 인사를 하셨다. 아저씨에게 종교가 있다면 교회를 다닐 것이다. 언젠가 갔던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사를 했다. 직선으로 곧게 뻗어가는 높은 음정의 인사말은 우리를 향한 인사인지, 낯선 환경에서 스스로의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무실의 적막을 깨우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반대쪽 책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여름용 양말을 권하는 아저씨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그리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어쩌다 만나게 되면 몰라도 일 년에 서너 번씩 보는 사이라 하면 생각보다 자주 보게 된다. 물건이 다양하게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에 샀던 양말이 아직 있는데 또 사려니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이다. 안 그래도 맞은편에 앉은 직원은 달갑지 않은 얼굴로 곧 자기 자리로 아저씨가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곤란한 표정으로 구매 거절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신규직원도 보였다. 팀장은 '저번에도 샀거든요'라고 말한다. 후줄근한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의 아저씨는 '괜찮아요. 그럼 다음에 사주세요'라고 말한다. 정말로 괜찮아서 괜찮다는 건지, 아니면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사무실에 있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출입한다. 직원과 민원, 제대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리숙한 카드회사 직원과 한 가정의 가장일 것 같은 중년의 보험설계사,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쁜 아침을 보냈을 화장품 영업사원이나 건강식품 판촉사원들, 다리나 신체 어느 곳이 불편한 것 같은 아저씨 등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얼마나 큰 용기를 냈어야 낯선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우렁찬 목소리를 뒤로한 두려움을 나는 가끔 본다.


언젠가 같이 일하는 직원이 출입구 앞에 '잡상인 출입금지'라고 큰 글씨로 프린트 한 종이를 붙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평소 관심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사람이라 그런 상황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다. 그녀는 평소 외부인이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리는 게 싫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종종 물건을 사거나 카드를 만드는 나를 보고 의아하게 보긴 했지만 그렇게 인상을 쓰지는 않았다. 나는 몇 년 동안 눈치 없이 지내다 그날에서야 알았다.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 사람들이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자꾸 뭘 사주고 해 주니 그들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도 맞았다. 그래도 나는 큰 마음먹고 오는 그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싶었다.

며칠 뒤 나는 사무실 앞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슬쩍 종이를 떼버렸다.


"안녕하세요!"

사무실 반대편에서 시작한 아저씨의 동선이 내 자리까지 왔다. 가방 안을 슬쩍 보니 오늘 우리 사무실에서 양말은 하나도 팔지 못한 것 같았다. 가지런하게 열 켤레씩 모아 한 다발로 묶어놓은 양말이 보였다. 양말은 열 켤레씩 한 묶음에 만원이었다. 몇 년째 늘 같은 가격이라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양말은 모두 국내 생산이라 품질이 좋았다. 지난 5년 내내 나는 다른 곳에서 다른 양말을 사 본 적이 없었다.

-다섯 개만 주세요.

지갑을 보니 만 원짜리 네 장과 오천 원 지폐 두 장이 보여 꺼낸 말이었다.

"와, 오늘 하루 종일 팔 물건인데, 감사합니다!!"

속옷 같은 흰색 민소매 옷을 입은 아저씨가 연신 허리를 굽히자 언뜻 땀냄새가 났다. 아직 오전 시간인데도 밖이 얼마나 더운지 짐작이 갔다. 어쩌면 사무실에서 흘린 땀일 수도 있겠다.

양말 다섯 묶음을 받아 맨 아래 서랍을 열었더니, 지난번에 사둔 양말 몇 묶음이 그대로 있었다.

"행복하세요!! 오늘은 정말 좋은 일만 생길 거예요.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가까운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덕담이 쏟아졌다. 아니면 마수가 좋아 오늘 하루의 운을 미리 예측한 말일 수도 있었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출입문으로 향하는 그가 한 걸음에, 감사 인사 한 마디씩 했다. 아저씨만큼 큰소리로 대답하지 못해서 속상했다.


비도 오지 않는 장마가 이미 지났다며 본격적인 여름 더위를 알리는 뉴스를 본 게 어제저녁이었던 것 같다. 오늘도 예상 기온이 30도가 훌쩍 넘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잠깐 들른 이곳에서 아저씨가 더위를 좀 식혔다면 다행이겠고 그가 나에게 그랬듯, 오늘 그에게도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



이전 09화D-2, 퇴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