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옛날에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물을 끓여놨잖아.
그 물로 설거지도 하고, 밥도 하고 그랬다고 했던거 같은데
엄마랑 외출하고 다녀오니 그 가마솥에서 복자와 진아가 목욕하고 있던거 기억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까만 가마솥에서 둘이 빨개벗고 목욕하는 그 모습이 선녀탕 같았다고 하면 웃으려나?
6살 정도의 두 녀석이 엄마한테 쫒겨 나 등짝을 맞았던 게 나도 기억이 나.
한번도 그럴 생각도 못해봤던 건 장녀의 운명인걸까?
그래서 용기 내서 막내따라 방바닥에 오줌도 싸봤던거야!!!
가마솥이 있던 아궁이를 없어지고, 욕실과 주방이 생겼지.
가마솥대신 전기밥솥이 생기고, 아궁이대신 가스렌지가 생겼어.
엄마, 우리 집에 전기밥솥이 고장 났었잖아. 밥솥 버튼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자꾸만 튀어 올라왔어.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밥하는 법을 알려줬어. “진영아, 쌀을 이만큼 붓고, 물로 세 번 씻어. 그리고 손등에 물이 요만큼 올라오면 돼. 그리고 요걸(버튼) 눌러야 되는데 고장이 났으니까, 이걸로 받쳐 놔”하며 우리집에서 제일 무거운 전화번호부 책으로 밥 짓는 법을 알려줬지.
13살부터 아궁이에 불을 때 열이 넘는 식구들 밥을 해댔다며 한탄하며 내가 부엌에 들어오는 것도 끔찍이 싫어했는데, 그런 엄마가 갑자기 밥하는 법을 알려줘서 의아했었어. 며칠 뒤 엄마가 집을 나갔지. 그냥 ‘나갔구나.’ 했어. ‘왜?’라든가, ‘그럼 우리는?’라던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고 오히려 안심이 되었어. 엄마도 이제 행복하겠구나. 우리 엄마 이제 울지 않겠구나..그 생각만 들었어. 엄마가 나가고 아빠는 술만 마셨어. 머루 나무 그늘이 멋진 앞마당 평상에서 엄마가 담근 앵두 술을 빨간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마셨어. 밥도 먹지 않고 술만 이렇게 마시면 아빠도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아주 많은 양이었지. 통엔 앵두 알만 남았어. 아빠가 죽는다 해도 슬플 것 같지 않았어.
엄마가 집을 나가도, 아빠가 죽을 것 같아도 눈물이 나지 않던 나도 그 전기밥솥처럼 어딘가 고장이 났었나봐.
내가 그 밥솥을 써보기도 전에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어. 춘천 고모네 집에 있었다고 했어.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아빠한테서 도망쳐서 갈 수 있는 곳이 고작 거기라니. 맞고 사는 여자가, 죽지 못해 사는 여자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서 사실...반가움보다 절망감이 더 컸어.
한번은 학교 갔다 집에 온 내 손을 잡고 몰래 마구간에 숨었잖아. “쉿..아빠 술 마셨어” 엄마 손에는 시골에서 보기 힘든 검정 핸드백이 들려있었는데 나는 엄마가 또 집을 나가려나? 생각했었어. “진영아, 엄마랑 아빠랑 헤어지면 엄마랑 살래?”하고 물었던 거 기억나? 나는 고개를 옆으로옆으로 흔들었지. 그토록 사랑하는 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아 가만히 눈에 대봤다는 내가, 엄마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해서 엄마는 깜짝 놀랐지. ‘왜‘냐고 묻는 엄마에게 “그럼 아빠는 혼자잖아”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아빠는 안중에도 없었어. 그때 내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내 눈물을 엄마도 봤을까?
내가 아는 동네 아줌마 중 맞고 사는 여자는 끝집 순이 아줌마랑 엄마뿐이었어. 뒷집 고모도, 옆 옆집 외숙모도 맞고 살지 않았지. 같은 처지의 앞집 순이네 아줌마는 아들 둘이 떡하니 버티고 서서 술 취한 아빠로부터 아줌마를 지켜준다며 한숨을 푹 쉬었잖아. 그 말을 듣고 정말 용기를 내고 싶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이불 밖으로는 손가락도 하나 나오기 힘들더라. 나는 엄마를 지켜기에는 아무 힘이 없었어, 내 사랑은 엄마에게 구원이 될 수 없으니 엄마 스스로 엄마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엄마, 있잖아.
나는 엄마가 엄마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랐어.